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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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소월과 함께 남산 길을 걷다

우리말 어감·리듬 아름답게 살려 / ‘그림 같은’ 구절 읊으며 호사 누려

서울 회현역은 길어서 1번 출구는 남대문시장 있는 쪽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다. 나는 시간을 여유 있게 잡아 오랜만에 남대문시장 구경도 겸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안경을 하나 사야겠는데, 뭣도 찾으면 없다더니 그 흔한 안경 행상을 남대문에서 찾기가 힘이 든다. 그나마도 중국산 아니라 국산이라고 1만원이나 하는 것을 울며 겨자 먹기로 케이스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산다. 한가로운 기분으로 시장통을 유유자적하다 길이 회현역으로 통하는 곳에서 철 늦은 수박 한쪽을 얻어먹는다. 1000원의 행복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회현동이라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이 모여 산 남촌의 중심지대 중 하나, 음식점과 술집이 많았고 그 영향으로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유흥과 관계된 사연이 많다. 문학에서 회현동이 출현하는 것은 김승옥의 단편소설 어딘가에서 본 적 있고는, 손창섭 장편소설 ‘길’에서 상경소년 성칠이가 진옥 여관이라는 곳에 ‘취직’해 서울살이를 시작하는 곳에서다. 손창섭은 좋은 작가였다고 고개 끄덕이며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간다. 오늘 유난히도 유학생이 많다. 인도, 스리랑카, 투르크메니스탄, 중국에서 온 대학원 학생과 남산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올라간다. 언덕길 초입에서 대뜸 단체사진부터 찍고, 걷다 보면 다들 지치니까 일신교회 소박한 담벼락의 벽화며 한시도 구경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옛날 와우아파트 붕괴 사태로 물러난 김현옥 시장의 작품이라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 건물은 아직도 옛모습대로 50년 가까운 관록을 나타내고 있다. 10층 건물임에도 엘리베이터가 없다던가, 그래도 방 두 개에 화장실 딸려 인기가 있었단다.

후암동 쪽으로 내려가는 듯하다 해방촌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길 지나 옛날에 경성부 도서관 노릇하던 남산 도서관 옆에 ‘민족시인’ 김소월의 ‘산유화’ 시비가 선 곳에 모여 앉았다. 김소월은 민요시인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그의 ‘산유화’ 같은 시 속에는 그 스스로 번역도 했다는 옛날 중국 촉나라 여성 시인 설도(薛濤)의 ‘춘망사’(春望詞) 같은 한시가 스며들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말의 어감과 리듬을 지극히 아름답게 살려낸 소월의 시를 바로 그 때문에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다. 그의 시 구절을 떠올리다 보면 어쩌면 그는 그리도 사랑하는 마음의 ‘달인’이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이 ‘산’을, 세상을 질풍노도 헤치듯 살아온 포항 출신 선배 작가는 어찌나 잘 부르는지. 그리고 나는 또 가수 정미조가 부르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하는 ‘개여울’을 옛날 아주 옛날부터 사랑했던 것이고, 다섯 살 여섯 살 적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옛날처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이 반짝이고 있다. 내 영혼 속에 소월의 노래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의심해 마지않는다.

우리는 또 안중근의사 기념관 백범 광장을 지나 맑은 가을빛 아래 소월길을 걸어간다. 안중근과 김구는 모두 황해도 해주 사람, 그들은 역사의 제단에 자기 생명을 바친 사람, 그리고 소월은 시의 제단에 자신의 젊디젊은 생명을 바쳤다. 1902년생 그는 1934년에 불과 서른셋 나이로 삶을 등졌다. 그 소월이 정주 오산학교 중학부 거쳐 서울에 와 배재고보 다닐 때 남산에 깃을 들였다. 그 집이 어딘지는 오늘날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서 소월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런 인연으로 우리는 이 가을날 소월의 ‘그림 같은’ 시 구절을 읊으며 숲 사이 길을 걸어가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오후에 시작한 산책길은 어느새 해가 저문다. 술을 끊다시피 한 지 넉 달, 오늘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한국 풍물 익숙지 않은 학생들을 학과장과 함께 남대문 시장통 뒷골목 선술집으로 안내한다. 내가 마실 수 있는 술이라야 막걸리가 고작, 그래도 어떠랴. 오늘은 가을이 한창이고 달은 밝았고 소월을 한나절 만나고 난 다음인 것을.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