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로 갈수록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정부의 당초 기대와 달리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2008년 금융위기 이래 최악이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감산, 감원, 무급휴직 등의 극약처방을 내놓고 있다. 구조조정의 한파는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제조업뿐 아니라 유통, 항공, 게임까지 업종을 불문하고 전방위로 몰아치고 있다. 불확실성이 걷히지 않고 경기 바닥이 미뤄지면서 기업들은 당장 내년도 사업계획도 안갯속에서 짜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신세계와 롯데마트 등 유통업계는 정기인사 시즌이 불과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임원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이마트는 6년간 회사를 이끌어 온 이갑수 대표이사와 부사장보, 상무, 상무보 등 11명을 21일 또는 22일에 교체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말 기준 미등기 임원 40명 중 11명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다. 롯데도 온·오프라인의 극심한 경쟁과 소비침체로 실적부진을 겪고 있는 유통 부문 인사를 예년보다 한 달 앞당길 계획이다.
올해 1조원대 적자가 예상되는 LG디스플레이는 지난달 8년간 대표이사를 지낸 한상범 부회장에서 재무전문가인 정호영 대표 체제로 전환하고 임원도 25% 감축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기업이 임원인사를 조기 단행하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엄중하고 위기의식이 크다는 것”이라며 “새 CEO가 내년 사업계획을 직접 만들면서 위기 극복 플랜도 함께 책임지고 마련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어닝쇼크 등 극심한 실적부진을 겪고 있는 기업들은 공장을 폐쇄하거나 생산량을 조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건비 감축을 위해 희망퇴직, 무급휴직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여행 보이콧 여파로 수요가 급감한 항공사들은 국내선 화물운송 서비스를 일부 중단한 데 이어 인원 감축에 나섰다. 업계 맏형인 대한항공은 최근 최대 6개월의 단기 희망휴직을 받기로 했다. 앞서 매각을 앞둔 아시아나는 지난 4월 희망휴직에 이어 5월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자동차업계도 마찬가지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생산절벽에 시달리면서 8월 말 전체 생산직의 20%인 4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및 순환휴직을 실시했다. 올 3분기까지 열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쌍용차도 임원 20%를 줄이고 임원 급여를 10% 삭감하며 조직개편에 돌입했다. 자동차부품 업체 만도는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 등으로 창사 이후 처음으로 임원을 20% 감원하고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수요가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 미·중 무역갈등으로 인해 타격이 더 컸다”며 “자율주행, 미래차 등의 신기술 개발 외에는 긴축경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업체들의 거센 추격으로 LCD(액정표시장치)패널 판가가 급락해 수익성이 악화한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도 이달부터 LCD 라인 일부를 폐쇄하고,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지난해 역대 최대 호황을 누렸던 반도체 업계는 올해 영업이익이 반토막 났다.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가 무너지자 수출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주완 연구위원은 “올해는 반도체가 버팀목이 아니라 발목을 잡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IT(정보기술) 시장의 수요 부진으로 낸드플래시와 D램 가격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자 SK하이닉스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도체 시장이 얼어붙었던 2008년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7월 감산을 결정했다. 삼성전자도 일부 반도체 생산라인 탄력 운영을 통해 사실상 감산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이례적으로 투자 확대를 주문한 건설업계는 ‘상저하저’ 실적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회사의 한 임원은 “건설업계는 한번도 경기가 ‘고(高)’인 적이 없었다”며 “걸핏하면 쏟아지는 규제 탓에 올해 내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4분기에 마지막 남은 분양 물량을 소진할지, 내년으로 미뤄야 할지 아무도 결정을 못 하고 있다”며 “건설, 특히 주택경기는 정부 정책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건설 불황은 서민 생계에 직격탄인 만큼 정부에서 불확실성을 걷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 부진에 주52시간·최저임금 타격 규모 작은 중견·중소기업 더 큰 피해
중소·중견기업들은 ‘상저하고’ 경기 흐름이 깨진 데 이어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정책 파급효과가 대기업보다 규모가 작은 이들 기업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20일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한 중소기업인은 “우리는 옥외공사가 많아 작업이 가능한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며 “선행 공정이 완료되지 않으면 후속 공정이 진행되지 않아 실제 작업일수는 더 적어 공기를 맞추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건설업 월평균 근로일수는 17.8일로 전체 산업 중 가장 적었다. 건설근로자는 특정기간에 연장·야간·휴일근로를 한 수입으로 일이 없는 날의 수입을 보충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주 52시간 적용 시 수입이 대폭 감소할 수 있다.
반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건설 현장의 주문에 따라 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레미콘, 콘크리트 등 비금속제조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레미콘 업체 대표는 “공사현장 변수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운송직원과 납품처 간 긴밀한 의사소통이 필요해 교대근무도 쉽지 않다”며 “성수기와 비수기 간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토로했다.
산업연구원은 국내 제조업체 1051곳을 대상으로 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4분기 시황이 대기업은 전 분기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중소기업은 부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월별로 실시하는 중소기업경기전망조사에서도 중소기업경기전망지수(SBHI)는 부진한 흐름을 이어갔다. SBHI가 100을 넘으면 다음달 전망을 긍정적으로 답한 업체가,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답한 업체가 많았다는 뜻인데, 지난 2월 지수는 76.3에 그쳐 제조업의 경우 글로벌 외환위기 때인 2009년 3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후 하반기에도 SBHI 지수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올해 들어서는 전년 동월 대비 전망이 좋았던 경우가 한 차례도 없었다.
중소기업연구원 정유탁 책임연구원은 “정책적 요인들이 중소기업 경기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내수부진·수출부진 역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부적으로는 올 초만 하더라도 잘 풀릴 줄 알았던 미·중 무역갈등이 빙하기가 됐고 일본과의 통상마찰도 있었다”며 “내수도 소비가 점차 둔화하며 설비투자가 안 좋아졌기 때문에 연초 예상보다 좋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중견기업연합회 박양균 정책본부장은 “주 52시간제가 확대되는 등 내년의 경우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며 “중견기업의 경우 대부분 최저임금보다 높은 임금을 지급하지만 최저임금이 오를 경우 기준점이 오르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향후 노사 임금협상 등에서 비용부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수미 기자·산업부 종합·이우중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