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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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27번 외친 文 “무거운 책임감”… 소주성 언급은 안 해

33분간 연설 어떤 내용 담았나/국정 키워드/ 예산안 목표 ‘혁신·포용·공정·평화’/ “사회·교육·문화 전반서 공정 구축”/경제·재정정책/ “재정이 대외충격의 방파제 역할”/ “대한민국 재정 최상위 수준” 자평/공수처 신설/ “검찰 스스로 엄정한 문책 않으면/ 우리에게 대안 있는지 묻고 싶어”/남북관계/ “한반도 항구적 평화 마지막 고비/ 대화만이 비핵화의 벽 무너뜨려”/전문가 평가/ “대통령 메시지 ‘공감성’ 문제” 지적/ “지난 정권 국정농단 언급은 실책”
‘X’ 표시하는 한국당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박수를 치는 반면 상당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손으로 ‘X’ 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더 활력 있는 경제를 위한 ‘혁신’ △더 따뜻한 사회를 위한 ‘포용’ △더 정의로운 나라를 위한 ‘공정’ △더 밝은 미래를 위한 ‘평화’를 내년도 예산안과 세법개정안의 목표로 제시했다. 특히 ‘조국 사태’를 의식한 듯 ‘공정’에 큰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야당과 전문가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비리 의혹에 대한 문 대통령의 태도가 여전히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33분간의 시정연설에서 ‘공정’을 27번이나 사용했다.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국민’(33번)과 ‘경제’(29번)였지만, 내년 예산안을 위한 시정연설이란 점을 감안하면 ‘공정’이 핵심어나 마찬가지였다. 공정 다음으로는 ‘혁신’(20번), ‘포용’(14번)이 뒤를 이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보듬고, 갈등을 줄이며, 혁신의 과실을 모두가 함께 누리게 될 때 국가사회의 역량도 더불어 높아진다”며 “그것이 포용이다. 공정은 혁신과 포용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라고 말했다. 공정을 혁신과 포용의 밑거름으로 본 것이다. 문 대통령은 “‘공정’이 바탕이 돼야 ‘혁신’도 있고 ‘포용’도 있고 ‘평화’도 있을 수 있다”며 이를 더욱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공정의 의미에 대해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라며 “사회지도층일수록 더 높은 공정성을 발휘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취임 후 연속 세 번째로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직접 하는 기록을 남겼다. 2017년과 2018년에 강조되어 온 ‘적폐청산’과 ‘소득주도성장’은 이날 언급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시정연설에는 비록 실명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 전 장관과 관련된 문제도 담겨 있었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집회에서 분출된 국민 목소리와 관련해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엄중한 마음으로 들었다”면서도 “공정과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고 말했다. 조 전 장관 사퇴와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특히 “국민의 요구는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자는 것”이라며 “사회지도층일수록 더 높은 공정성을 발휘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조 전 장관 가족과 관련된 문제를 ‘합법적인 불공정’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목소리를 공정을 위한 개혁 요구로 판단한 문 대통령은 “경제뿐 아니라 사회·교육·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 등 검찰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쥐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공수처 신설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 등 야당을 겨냥해 “검찰 내부의 비리에 대해 지난날처럼 검찰이 스스로 엄정한 문책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되물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2일 오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도중 공수처 관련 내용을 말하자 두손으로 X자를 그려보이며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권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 야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조 전 장관 일가의 비리가 ‘공정’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게 아닌가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어려운 대외경제 여건을 설명하며 “재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 대외충격의 파고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분간 확장적 재정 기조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며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고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미·중 무역분쟁과 보호무역주의 확산으로 세계 경제가 빠르게 악화되고,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도 엄중한 상황을 맞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예산편성에 대해 야당은 재정 건전성이 우려된다고 반대하고 있다. 문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우리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재정 건전성”이라면서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재정과 경제력은 더 많은 국민이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성장했고, 매우 건전하다”고 강변했다. 내년도 국가채무비율은 GDP 대비 40%를 넘지 않는 등 재정 건전성 면에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최상위 수준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대외 파고를 넘어 활력을 되찾고, 국민들께서도 삶이 나아졌다고 체감할 때까지 재정의 역할은 계속돼야 한다”며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내년도 확장예산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재정은 국가 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며 “내년도 예산안과 세법개정안에는 더 활력 있는 경제를 위한 ‘혁신’, 더 따뜻한 사회를 위한 ‘포용’, 더 정의로운 나라를 위한 ‘공정’, 더 밝은 미래를 위한 ‘평화’, 네 가지 목표가 담겨 있다”고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 문제와 관련해선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선결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실무협상이 실패로 끝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선 “한반도는 지금 항구적 평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고비를 마주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함께 넘어야 할 비핵화의 벽으로 대화만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친 뒤 자유한국당 의원석으로 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이 다시 마주 앉아 대화하기까지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도 호소했다. 문 대통령은 “상대가 있는 일이고 국제사회와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 맘대로 속도를 낼 수 없다”면서도 “핵과 미사일 위협이 전쟁의 불안으로 증폭되던 불과 2년 전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백하다”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변함없는 추진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 말미에서 “정치는 항상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믿는다”며 “저 자신부터,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과 함께 스스로를 성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와 ‘여야 정당대표들과 회동’을 가동하자고 정치권에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의 시정연설에 대해 다소 비판적 의견을 내놨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남북 평화 문제가 아니라 국내 평화 문제부터 얘기했어야 했다”며 “조 전 장관을 둘러싼 국론분열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 국정농단이라는 옛날 정권 얘기를 꺼낸 것은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는 설득으로 강조할 문제가 아닌데도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것과 거리가 먼 얘기만 했다.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국민과 더 멀어질 뿐”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2020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마치고 나오며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대학 김형준 교수 역시 “대통령이 국회에서 예산 관련 시정연설을 하는 건 예산을 갖고 국정운영을 어떻게 하겠다고 밝히는 점에서 바람직하다”면서도 ‘조국 사태’ 등과 관련해 “대통령 메시지가 ‘공감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김관옥 계명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조국 문제에 대한 구체적 사과가 없어 아쉬웠다. 고위공직자들의 공정성이 더 높아야 한다고 표현한 걸 아예 ‘이 부분에서 잘못이 있었다’고 얘기했다면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박현준·곽은산 기자 hjun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