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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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명암의 표면적 분석…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 화폭에 담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 그리고 그의 사과 / 인상주의 기법 적용 평면성 탈피 시도 / 시지각적 경험 바탕 대상 분할해 그려 / 현대미술 대표적 화풍 입체파에 영향 / 피카소 “나의 유일한 스승, 아버지였다” / 동그란 형태의 사과 단순하고 본질적 / 학창시절 친구인 졸라와의 우정 상징 / 백번이상 다양한 초점과 각도로 관찰 / 이미지로 인식된 사물에 입체감 표현

#우리 모두의 아버지 세잔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바로 폴 세잔(1839~1906)의 사과 연작이다. 폴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 흥미를 느껴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부유한 은행가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법 공부를 시작했다. 2년간 공부를 하며 지친 그는 파리로 떠나 미술을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창 시절 친구인 에밀 졸라가 지지를 했다.

이십 대 초반의 세잔은 파리의 아카데미 쉬스에 입학했다. 회화를 배우고 그에 관한 의견을 나눌 동료들을 만났다. 카미유 피사로, 아르망 기요맹 등과 주로 함께했다. 원하던 일을 시작하고, 좋은 동료를 만났지만 파리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훌륭한 작가를 만나는 기회는 매번 좌절감으로 결론을 맞았다. 자신의 그림 실력이 특출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6개월 만에 우울증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휴식을 취한 뒤 그는 다시 파리로 향했다. 여전히 그림 실력은 부족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머물렀다. 세잔이 머무르는 동안 파리 미술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었다. 사진의 등장과 함께 회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이제 대상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 이상을 해내야 했다. 작가들은 사진이 담지 못하는 시각 체험을 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야외에서 태양 아래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화풍을 창조했다.

말년에 머물렀던 작업실은 본가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에 도보 20분이면 도착했다. 세잔은 이 전망대에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며 수십 점의 작품을 남겼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제공

세잔 역시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부터 1877년 제3회 인상파 전시까지 참여했다. 하지만 자신을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로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이 3년의 세월 동안 인상주의 기법을 화폭에 적용한 것은 그의 작품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막연히 잘 그리기 위해 움직이던 붓질이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인상주의를 통해 빛과 명암의 표면적인 분석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의 기본이 되는 형태를 연구하고자 마음먹었다.

이후 세잔은 자기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우리 눈에 담기는 세계의 원형적인 모습을 재현하는 시도를 했다. 그는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로 화면을 채우지만, 그것이 가진 평면성에서는 벗어나고자 했다. 자연의 본질적인 형태를 담기 위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았다. 시지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대상을 여러 면으로 분할해 그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그려낸 대상 중에 사과가 있다.

이러한 작풍은 훗날 피카소의 입체파에 영향을 끼쳤다. 입체파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포문을 연 대표적인 화파다. ‘모더니즘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은 나뉜다. 그 주인공을 누군가는 세잔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모네라고 한다. 피카소의 경우에는 세잔을 두고 “세잔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사과가 가진 첫 번째 이야기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는 그의 아틀리에가 여전히 있다. 생의 마지막인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머무른 장소다. 아틀리에 안에는 세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그림 그릴 때 입던 작업복, 외출할 때 입은 모자와 외투도 옷걸이에 그대로 걸려 있다. 장식장과 선반 위에는 석고상, 럼주병, 올리브 단지 등이 올려졌다.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그의 걸작 속에 한 번씩은 등장한 적 있는 오브제들이다. 그리고 그 오브제들 사이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사과다.

세잔은 왜 사과를 그렸을까? 수많은 사과 작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든다. 이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것은 에밀 졸라와의 이야기다. 앞서 언급하였듯 세잔과 에밀 졸라는 학창 시절 친구다. 두 사람은 고향에서 부르봉 학교에 함께 다니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 시작은 체구가 작아 괴롭힘당하던 졸라를 세잔이 도와주면서부터다. 이때 졸라는 고마움을 표현하며 세잔에게 사과를 선물했다.

세잔이 아버지 집에서 그린 작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제공

세잔이 파리로 향할 때도 졸라는 함께였다. 파리에서 세잔은 그림을 그리고 졸라는 글을 썼다. 두 사람은 동향 친구이면서 예술을 함께 논하는 동지였다. 가장 친한 친구와의 이야기를 품은 사과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등장했다.

항상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고 1886년에는 3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도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에도 싸우는 장면이 곧잘 나온다. 하지만 이후로도 세잔은 계속 사과를 그렸고 먼저 세상을 떠난 졸라의 소식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였다.

“잘 그린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하지만 작가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네고 있다.” 세잔의 사과를 두고 프랑스의 어느 비평가가 한 말이다. 이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에밀 졸라와의 관계를 포함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잔은 항상 단순히 시각적 경험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어떻게 지각하고 있는가까지 담으려 애썼다. 지각은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 쌓여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사과가 가진 두 번째 이야기

세잔이 사과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졸라와의 사연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그중 결정적인 이유는 사과의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과는 조금 못났다 하더라도 모나지 않아 동그란 원형의 모습을 가진다. 단순하며 본질적이다.

세잔은 인상주의 작품 시도 이후 자연의 본질적인 형태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적인 탐구로 이어졌다. 눈은 카메라 렌즈처럼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초점으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대상을 관찰한다. 이러한 파편이 뇌에 모이면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된다.

세잔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사과의 진짜 모습을 그려내려 했다. 하나의 사과를 그리는 데에도 의자 앞에 백 번 이상을 앉았다. 실제로 사과는 의자 앞에 앉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또는 빛의 정도에 따라 변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을 모두 담으니 사과의 표면은 균질하지 않게 그려졌다. 어쩐지 뭉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낯선 모습이야말로 사과의 본질적 모습일 수도 있다.

세잔의 사과 연작 중 드문 모습을 가진 작품. 꽃 피우는 식물을 그린 경우가 별로 없는 편이다. 한때 모네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유명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제공

세잔이 이렇게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갖게 된 것은 쉰 무렵이다. 얼마 전 읽은 ‘광대하고 게으르게’라는 책에도 세잔의 이런 삶의 궤적에 관한 글이 있었다. 작가는 이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세잔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를 말해준다. 내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할 것. 사진 같은 신기술의 출현, 세상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것. 그리고 각자의 전성기 시계는 다르다는 것.”

벌써 가을의 중반이 지나버렸다. 상강이 지났으니 나뭇잎도 모두 떨어질 것이다. 한 해가 또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올해가 시작하며 배우고자 다짐했던 운동이 있는데 아직 한 번을 못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다고 여기는 편이지만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안다. 각자의 전성기 시계는 다른 것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꽤 실력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추워지는 날씨에 더 게을러질 생각 말고 몸을 움직여야겠다 다짐하는 하루의 끝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