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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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가을날의 그리움

그리움의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은 가을 풍광을 감상할 여유도 없는데 계절은 어느새 눈부시게 현란한 색으로 갈아입었다. 가까운 산에라도 훌쩍 가고 싶은 요즘, 우리나라 절경 60여 곳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국내 여행 추천영화라고 불리는 ‘가을로’(감독 김대승)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담양 소쇄원 장면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하게 힐링되지만, 특히 노랗게 단풍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은 너무도 아름다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영화 장면 속 자연은 멋지지만, 내용은 한국 현대사 급성장의 후유증이 낳은 가슴 아픈 현장인 삼풍백화점 붕괴 희생자를 다루고 있다.

결혼을 앞둔 현우(유지태)와 민주(김지수)는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바쁜 현우는 민주에게 먼저 백화점에 가있으면 일 정리하고 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백화점에 도착한 현우의 눈앞에서 백화점은 처참히 무너진다. 그날 민주는 땅 속에 파묻힌 채 나오지 못한 것이다. 먼저 가 있으라고 한 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현우는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10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라는 제목의 찢겨지고 더럽혀진 민주의 다이어리가 현우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현우는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올라온 민주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이어리 속 민주의 목소리(내레이션) 안내에 의지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사랑은 만남보다 그리움으로 더 애틋해진다. 민주에 대한 그리움은 여행의 발자취마다 과거의 그녀를 소환한다. 민주에게 바치는 현우의 뒤늦은 애도는 새로운 방식으로 현우를 변화시킨다. 죽음이라는 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표현하는 방식이랄까. 현우가 죽은 민주를 애도할 때마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세진(엄지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세진과의 새로운 인연은 현우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높아가는 하늘과 볼에 와닫는 상쾌한 바람 속에서 현우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 것이다.

이 영화는 자연이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놀라운 선물을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 제럴드가 ‘가을의 상쾌함을 느낄 때 삶은 새로이 다시 시작된다’고 말한 것처럼 이 가을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을 찾아보는 것을 어떨까.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