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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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EP 타결, 중국 승리? 아세안 승리! 미국은…

수년 협상 끝에 4일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이 타결되면서 동아시아 시장 통합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주요국들의 성적표가 나왔다. ‘협동하는 아세안’의 위력이 다시 한 번 확인됐으며, 중국 리더십은 한계를 드러냈다.

 

문재인(오른쪽 다섯번째) 대통령이 4일 태국 방콕의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 참석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및 각 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아세안의 힘

 

먼저 동아시아 경제 통합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한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2004년 아세안에 ‘아세안+3(한·중·일)’ 형태의 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EAFTA)을 제안했다.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2006년 아세안+3에 호주, 인도,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아세안+6’ 형태의 동아시아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EA)를 제안했다. 중국과 일본이 견제를 주고받으면서 동아시아 경제 통합 논의가 지연되는 사이,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을 배제하고 나머지 아시아 동맹·우방국들을 포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RCEP을 제안한 것은 아세안이었다. TPP에 대응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RCEP 추진에 힘을 실어야 했다. 2012년 중국은 RCEP 추진을 본격적으로 돕겠다며 합류, 2013년 협상이 개시됐지만 중국은 논의 과정에서 야욕만큼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아세안 10개국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내부 합의과정을 거친 뒤 공동입장으로 협상에 임했다. 논의를 지연시키는 요소였지만 아세안은 내부 논의를 우선했다. 강력한 주도 국가가 없고, 각국 복잡한 계산법 등도 논의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면서 타결 목표 시한이 2015년, 2017년으로 거듭 연기됐다.

 

그러던 중 보호무역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TPP를 탈퇴한 것이 RCEP 협상을 가속화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한 불안감이 RECP 타결 동력이 됐다. 미국 CNBC는 “다른 국가들에게 RCEP은 최소한 중기적으로는 미·중 무역전쟁의 악영향을 완화할 대안으로 간주됐다”고 전했다. 아세안으로서는 아세안이 제안하고, 아세안의 단합된 힘을 유지하면서 주요국들의 구애를 이끌어냈고,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을 출범시킨 셈이다. 아세안 주요국인 싱가포르의 스트레이트타임스는 “인도가 불참하더라도 이번 협정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자유무역협정”이라며 “이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은 (내년) 서명 후에는 미·중무역전쟁으로 타격을 입고 있는 이 지역의 경제적 가능성에 활력소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4일 태국 방콕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중국 리더십 한계

 

미국과 무역 전쟁 중 다른 돌파구를 열게 된 중국은 이번 협정 타결의 수혜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 중 RCEP 타결이 다급해졌다(keen)”고 보도했다. 미국을 향해 큰소리도 쳤다. 중국 관영언론 글로벌타임스는 5일 “(RCEP 타결은)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지지하고 미국의 무역 보호주의를 거부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익은 얻었지만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다른 국가들의 견제를 받았고, 강력한 주도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중국을 지목하며 합의에서 빠진 인도가 대표적 사례다. 인도는 값싼 중국 상품들이 자국에 쏟아질 것을 우려하는 농민과 야당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모디 총리는 “중국에 대한 우려를 거둘 수 없다”며 결국 참여 결정을 미뤘다. 워싱턴포스트는 RCEP에서 빠진 인도를 TPP에서 탈퇴한 트럼프 대통령에 비교하며 ‘흥 파괴자’(party pooper)로 비유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대미무역전쟁의 균형추로서 이번 협정이 가능한 빨리 발효되기를 바라는 중국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서명은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전했다.

 

다른 국가들도 인도가 참여해 중국이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견제하길 바랬다. 가디언은 “많은 이들이 중국을 견제할 균형추로 인도를 바라봤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멋쩍은 미국

 

반(反)트럼프 성향이 짙은 미국 주요 언론들은 RCEP 타결을 ‘중국의 승리, 미국의 패배’로 규정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TPP의 운명과 대조했다.

 

미국 CNBC는 “중국은 RCEP을 (미·중 무역전쟁으로 입은 피해의) 회복전략으로 본다”고 설명했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트럼프가 관세장벽을 세우는 동안 아시아는 자유무역에 베팅했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고도의 긴장이 요구되는 때”라며 위기감을 강조했다.

 

포린폴리시는 특히 한국을 포함해 일본, 멕시코, 캐나다 등과도 기존 양자 자유무역협정을 미국에 더 유리하게 바꾸려 재협상을 추진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관련, “이들 중 다수는 RCEP으로 더 많은 자유 무역 기회를 열 수 있게 됐고, 이는 미국 제품의 시장이 줄어들고 미국 제조업체와 경쟁하는 아시아 공급망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또한 “일본, 한국, 호주와 같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이 중국과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더 가까워지면 중국 정부가 미국 동맹국들에 대한 전략적 영향력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TPP와 RCEP을 비교하면서 양쪽 모두에 속한 국가는 7개국, TPP에만 가입된 국가는 미국을 포함한 4개국, RCEP에만 속한 국가는 미정인 인도를 포함해 9개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이 의도에 따라 RCEP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다. RCEP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합류를 지원(apply)하기 전에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부터 체결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가 초래한 결과를 에둘러 비판하는 뉘앙스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