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접경지역 인근 돼지농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해 42만마리 이상의 돼지가 살처분됐다. 양돈농가들은 경제적 손실과 언제 또다시 ASF가 번질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다. 돼지고기 소비마저 줄어 관련 산업이 위축되고 있다. 지난 5월 북한에서 ASF가 발병하면서 ASF 바이러스 유입을 막기 위해 비무장지대(DMZ)에 대한 방역 등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대처가 미흡해 애꿎은 돼지만 땅에 묻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는 뒤늦게 DMZ에서 항공방제와 야생멧돼지 포획작전을 벌이고 있다.
ASF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전형적인 ‘사후약방문’이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고질병을 또 목격했다. 사건이 터진 후에야 부랴부랴 허둥대며 대책을 마련하는 무사 안일한 대응에 분노하다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고시원과 스포츠센터에서 화재가 나 인명피해가 발생해야만 행정기관은 전수조사를 벌이고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는 것도 판에 박힌 관행처럼 굳어졌다. 그럴 때마다 미리 위험요인을 찾아내서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정부를 믿지 못해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기대를 접는 게 속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서울시가 미세먼지 시즌제를 도입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보면서 행정에서도 이슈와 현안에 얼마든지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내 미세먼지는 겨울과 이른 봄철에 고농도로 발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12월부터 3월까지 발생하는 미세먼지의 월평균 농도는 연평균 대비 최고 30% 정도 높은 수준이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발생하면 비상저감조치를 아무리 시행해도 효과가 떨어진다.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 미세먼지 시즌제다. 사후약방문처럼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시행하는 비상저감조치가 아니라 고농도 미세먼지 발생이 잦은 겨울철부터 이른 봄철까지 평소보다 강도 높은 저감대책을 가동해 미세먼지를 집중 관리하는 차별화된 사전 예방적 특별대책인 셈이다.
미세먼지는 침묵의 살인자로 불린다. 2015년 전 세계에서 880만명이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으로 조기 사망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삼한사온(三寒四溫) 대신 미세먼지의 미(微)자를 넣어 삼한사미(三寒四微)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다. 미세먼지를 피해 맑은 공기를 찾아 떠나는 ‘미피여행’이 유행하기도 했다.
더 이상 미세먼지 때문에 삶의 질을 떨어트릴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세먼지 대책은 아무리 하찮고 작은 것이라도, 특히 예방적 대책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교통 무료 정책을 도입해 미세먼지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고 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 것도 서울시의 선제적 대응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예산낭비라는 비난을 감수한 채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과감한 행정추진은 미세먼지를 재난으로 규정한 서울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조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미세먼지를 사회재난에 포함시키는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과 대기관리권역법, 실내공기질관리법 등이 지난 3월 국회에서 의결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선제적 대응 때문에 이뤄졌다. 미세먼지에 대한 더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정책이 발표돼 미세먼지가 무서워 외출을 꺼리거나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는 일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기대한다. 국민들은 푸른 하늘 아래 맘껏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기를 희망한다.
박연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