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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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비디오 아트 30년 역사 속살을 들여다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대형 기획전 / 70년대 태동·8090 조각과 영상 접목서 / 영상과 서사에 주목한 90년대 후반까지 / 비디오아트 걸어온 길 물흐르듯 보여줘 / 백남준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압권 / 美 유명 작가 게리 힐 亞 첫 개인전도 열려
‘종이는 죽었다! 화장지만 빼고….” 백남준(1932∼2006)의 행보는 그야말로 미술사의 혁명이었다. 1970년대 초 백남준은 미술을 캔버스로부터 해방시키고 브라운관을 활용, 시공간 제약을 받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민주적 예술을 창안했다. 그가 ‘시간을 지휘하는 예술가’로 불리는 이유다. 그에게서 출발한 비디오 아트는 실험과 새로움, 대안의 의미를 가지며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 TV, VCR, 비디오 카메라, 컴퓨터 등 미디어 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현대사회를 점령해왔다. 그토록 화려하고 전위적이었던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백남준의 ‘굿모닝 오웰’(1984). 백남준은 1984년 첫날, 위성을 이용하여 미국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프랑스 파리를 실시간으로 연결, 예술가들이 대거 참가하는 위성 TV쇼를 기획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9)에서 감시와 통제장치로서 텔레비전의 비관적 전망을 제시한 것에 반해, 매스 미디어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 비디오 아트 태동부터 전개까지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지난달 28일부터 내년 5월31일까지 과천관에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비디오 아트 30여년 역사를 조망하는 기획전 ‘한국 비디오 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를 연다.

1970년대 초기 비디오 아트부터 1980~1990년대 조각과 설치에 영상을 접목한 비디오 설치 작업, 영상 이미지와 서사에 주목한 1990년대 후반 작업까지 한국 비디오 아트의 흐름을 소개한다.

김구림, 박현기, 김영진, 이원곤, 김수자, 함양아, 박화영, 문경원, 전준호, 김세진 등 60여 작가 작품 130여 점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세대별 특성과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육근병의 ‘풍경의 소리+터를 위한 눈’(1988) 등 9점은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제작됐다.

같은 비디오 아트지만 시대와 주제, 작가에 따라 작품 스펙트럼은 넓다. 초기작 가운데 1974년 선보인 실험미술 선구자 김구림의 ‘걸레’는 하얀 걸레로 바닥을 닦는 장면을 보여준다. 점점 더러워지면서 검정으로 변하는 걸레는 결국 갈래갈래 조각난다.

백남준 작품도 본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1984년 1월1일 생방송된 백남준의 TV 위성쇼를 편집한 작품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파리, 서울을 연결하는 이 프로젝트로 백남준과 비디오 아트는 세계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는 여러 TV 수상기를 오브제처럼 쌓거나 중첩하는 ‘비디오 조각’, 조각의 물리적 움직임과 영상을 결합한 비디오 키네틱 조각 작업이 이뤄졌다. 또한 1990년대에는 성, 정체성, 여성주의 담론과 함께 신체 움직임을 보여주는 비디오 퍼포먼스가 등장했다.

양복을 입고 가방을 든 남자가 대형 수조 안에서 힘겹게 걷는 모습으로 IMF 외환위기를 다룬 이용백 등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당시 시대상을 담아낸 작품들도 눈에 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전시 후 철거하기 아까울 정도로 한국 비디오 아트 역사를 교과서적으로 정리했다”며 “한국 비디오 아트의 태동과 전개를 입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독자성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초석”이라고 말했다.

게리 힐의 ‘관람자’(Viewer·1996). 약 14m의 이 작품에서 노동자 17명이 미세한 표정 변화 같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미동도 없이 서있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작품 속 주인공인 노동자는 서로를 응시하고 있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비디오 아트 거장 ‘게리 힐’ 개인전… 亞 최대 규모

미국에서 활동하는 비디오아티스트 게리 힐(68)의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도 열린다. 경기 수원시립미술관에서 내년 3월8일까지 열리는 2019 국제전 ‘게리 힐: 찰나의 흔적’(Gary Hill: Momentombs) 전이다.

게리 힐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요소인 언어와 신체 그리고 인간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인간이 속해 있는 공간의 형태 등을 주제로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지속해왔다.

초기에는 조각가로 활동하다 1970년대 초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영상과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비디오뿐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최신기술로 작업하며 카르티에 재단의 작품 의뢰를 받았다. 2011년 아티스트 트루스트의 ‘예술 혁신가 상’을 수상했다.

이번 전시에는 특정 매체나 틀에 갇힌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 현대미술의 정신을 대변하는 ‘언어 예술가’(Language Artist)로서의 측면을 소개한다. 1980년대부터 올해 최신작까지 게리 힐의 작품을 총망라한다.

대표작 ‘관람자’(Viewer·1996)는 2층 전시실 한쪽 벽면을 꽉 채웠다. 약 14m 길이, 노동자 17명의 이미지가 거의 실물 크기에 가깝게 벽에 비춰졌다. 이들은 미세한 표정 변화 같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거의 미동도 없이 서있다. 각자 홀로 서서 관람객들을 응시한다. 그래서일까. 이를 바라보는 관객과 작품 속 주인공인 노동자들 서로 서로를 응시하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멈칫 선 관객은 그 사이에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또 바라보는 시선을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된다.

이밖에 ‘잘린 파이프’(Cut Pipe·1992), ‘원초적인 말하기’(1981∼1983), ‘벽면 작품’(2000) 등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테크놀로지, 가상과 실재공간에 대해 고찰하는 대표 작품 24점을 소개한다.

전시 작품 외에도 1970년대부터의 작가 작품 36점을 볼 수 있는 미디어 아카이브와 작가 인터뷰 영상 및 작가 소개가 담긴 국내외 도서를 비치해 전시 이해도를 높였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며 작품과 관객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탐구한 작가 게리 힐의 40년간의 작품 세계와 현재를 만나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