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재계 1세대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사진)이 향년 9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신 명예회장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잿더미 위에서 껌을 팔기 시작해 70년 만에 매출 83조원, 한국 재계 5위의 그룹을 키워낸 '롯데 신화'의 최정점에 서있던 주인공이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에 걸친 대기업을 일궈낸 고인은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롯데제과를 세운 뒤 유통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만들고 시장을 키워온 경제 성장의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롯데 일가 키워내며 한국 경제 성장 선구자
신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은 ’정열’과 ’신뢰’, ’내실’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이 모든 바탕인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일생의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삼았다. 평소 자신과의 약속은 물론이고 “고객과 한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한다”며 목숨과 같이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 명예회장은 일제 강점기인 1941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우유 배달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른 아침 제 시간에 우유를 배달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매우 친절했다. 이 때문에 당시 소비자들의 주문이 폭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유 배달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정확한 시간에 배달해야 한다’며 신용을 위해 배달원을 고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학비를 벌어야 하는 배달원이 배달원을 고용했던 것은 제 시간에 우유를 마실 수 있게 하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롯데와 거래하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와 거래하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신용을 지키기 위해 평소 열정과 내실을 다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인은 우유 배달 등으로 신용이 성공의 지름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신용이 있으면 살아남고, 없으면 죽는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험한 기업인이었던 셈이다.
44년 평소 신 명예회장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 하나미쓰가 찾아와 “군수용 선반 오일이 품귀상태”라며 ”자네가 공장을 차려 제조해보겠다면 5만엔을 출자할 용의가 있다”며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신 명예회장은 제안을 받아들여 사업을 시작했지만, 공장은 본격 가동해보기도 전에 연합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빚 갚을 길이 막막해진 고인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비누와 포마드를 제조하는 히까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오늘날 한·일에 걸친 롯데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전후 물자가 상당히 부족했던 시절이라 곧 큰 돈을 번 신 명예회장은 바로 빌린 돈을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집 한 채를 선물했다.
신 명예회장은 훗날 “당시 나는 사업을 한다기보다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 보답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처럼 남이 자신을 믿어 주는 '신용’(信用)을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 고인은 큰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미 몸으로 터득했던 셈이다.
48년 ㈜롯데, 59년 롯데상사 설립으로 일본에서 성공 기반을 다진 신 명예회장은 어려움에 처한 조국의 경제부흥에 기여하겠다는 다짐 하나로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가고자 67년 국내 유통 산업의 기반이 되는 롯데제과를 설립한 데 이어 73년 롯데호텔을 세웠다. 관광산업의 중요성을 앞서 내다 보고 당시만 해도 불모지인 이 땅에 국내 최대의 호텔을 세워 88년 올림픽 개최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변 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념과 뚝심으로 이뤄낸 성과물이다.
세계 최대의 실내 테마파크인 롯데월드를 세워 지속적인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앞장서고, 수많은 난관에도 세계적인 랜드마크이자 국내 관광 인프라의 정점인 롯데월드타워를 30여년에 걸쳐 2017년 끝내 완성했다.
◆‘형제의 난’ 재연될 가능성은?
신 명예회장의 별세는 그룹 경영권을 놓고 ’형제의 난’을 겪으면서 반목했던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화해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형제는 부친의 임종도 함께 지킨 데다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신 명예회장의 빈소에서 상주 역할을 하며 함께 조문객을 맞았다.
2018년 10월 국정농단·경영비리 재판 2심 선고 때 이후로 개인적으로도, 공식 석상에서도 만난 일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 형제는 부친의 별세를 계기로 물리적 거리를 좁힌 만큼 갈등을 봉합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낳고 있다.
롯데 일가가 오랜만에 모인 데다 장례를 치르려면 형제간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일도 많을 수밖에 없는 만큼 앙금이 조금씩 풀려 관계 개선에 이르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관측까지 나온다.
엘레베이터를 함께 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부회장)은 지난 30일 장레식장에서 상주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옆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니까 교감은 하지 않았겠느나”라고 언급했다.
한일 양국 롯데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을 살펴보면 ▲광윤사(고준샤·光潤社) 28.1% ▲종업원지주회 27.8% ▲관계사 20.1% ▲임원 지주회 6% ▲투자회사 LSI(롯데스트레티지인베스트먼트) 10.7% ▲가족 7.1% ▲롯데재단 0.2% 등이다. 신동주·동빈 형제의 개인 지분은 각각 1.62%, 1.4%다.
1대 주주인 광윤사는 2015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인 ‘형제의 난’이 발발했을 당시 고인이 장남에게 약속한 주식 1주를 매각, 결국 신 전 회장이 ’50%+1주’의 지분으로 최대주주에 올랐다.
당시 신 명예회장은 ’한 주’로 신 전 부회장은 일본 롯데를, 신 회장은 한국 롯데를 각각 경영하라고 암묵적으로 후계구도를 정한 게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반면 롯데그룹 측은 ”신 명예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의 지분을 나눠놓은 것은 능력으로 임직원에게 지지를 받아야 진정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달리 해석했다.
신 명예회장이 남긴 1조원대 사재(私財)가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서 다시 한 번 신 전 부회장(왼쪽 사진)이 동생 신 회장(오른쪽 사진)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흘러 나오고 있다.
이렇게 또 다른 분쟁의 서막이 열린다면 안 그래도 대내외 경기 부진에 발목이 잡혀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롯데그룹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크다.
신 명예회장은 ’작은 것도 크게 보는 시각’으로 성공한 거대 기업을 일구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굴지의 기업이 된 롯데의 첫 자산은 바로 신용과 신뢰를 강조하는 고인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셈이다.
아버지의 이런 뜻을 이어받아 형제가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게 재계 안팎의 공통된 시선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