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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北의 소련 외상 문전박대, 한·소 수교 앞당겨"

한·소 수교 30주년 맞아 1990년 당시 외교 비화 살펴보니…

올해는 1990년 한국이 러시아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러시아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줄여서 ‘소련’으로 불리며 공산 진영의 맹주 노릇을 했기에 한·소 수교는 동서 냉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냉전 시기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 단둘뿐인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해체된 뒤 그를 승계한 러시아는 한때 국력의 쇠퇴로 강대국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다시 존재감을 회복한 데 이어 한국과의 정치적·경제적 관계도 갈수록 밀접해지고 있다.

1990년 한·소 수교의 주역인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사진은 두 사람 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 사적으로 만난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국 "1990년 9월30일 수교를" VS 소련 "1991년 1월1일로 하자"

 

26일 외교가에 따르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수교는 참으로 극적인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당시 한국의 노태우정부는 ‘북방정책’이란 이름을 내걸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나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진두지휘 아래 소련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노선을 취했다.

 

어찌 보면 두 나라의 수교가 성사되기 좋은 여건이었으나 전통적으로 북한을 강력히 지지해 온 소련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노선 변화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990년 9월30일을 수교일로 삼자”는 한국의 주장에 소련측이 머뭇거리며 “해를 넘겨 1991년 1월1일에 수교하는 것으로 하자”는 입장을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 9월30일 미국 뉴욕에서 당시 최호중 외무부 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이 만났을 때 “그냥 오늘(9월30일) 수교하는 것으로 하자”는 극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북한의 무례한 태도가 한몫 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당시 소련은 한국과 수교를 하기로 방침을 정한 뒤 전통적 맹방인 북한 설득에 나섰다. 이를 위해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직접 평양으로 갔다. 하지만 북한의 양해는 얻기는커녕 ‘문전박대’에 가까운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1990년 9월30일 미국 뉴욕에서 당시 최호중 외무부 장관(오른쪽)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상이 한·소 수교 공동발표문에 서명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평양 갔다가 ‘문전박대’ 당한 셰바르드나제, 한·소 조기 수교 결심

 

최호중 전 외무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푸대접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며 “당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협박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고 이렇다 할 대접도 없었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그것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불끈하는 마음에 (1990년 중에 수교하자는) 한국측 주장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라고 덧붙였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양국 외상 회담에 앞서 마련된 공동 발표문 초안의 한국어본은 수교 날짜가 빈칸으로 돼 있었던 반면 러시아어본은 ‘1991년 1월1일’로 이미 명시돼 있었다는 점이다.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협상문 러시아어본의 ‘1991년 1월1일’ 위에 가로로 줄을 죽 그은 뒤 ‘1990년 9월30일’로 고쳐 적었다.

 

문제는 소련 기자 일부가 초안에 근거해 ‘소련과 한국이 1991년 1월1일에 수교하기로 합의했다’는 기사를 이미 본국으로 타전한 뒤였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불만 섞인 항의를 하자 최호중 외무장관이 대응에 나섰다. 당시 그는 “그렇게 보도한 것은 우리(한국·소련) 두 외상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기자)이 너무 성급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해 장내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