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취향과 개성이 다양해지기는커녕 획일화되고 있습니다.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입고, 먹는 시대에는 책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회는 책을 팬시 아이템으로 취급하거나 증오 상품으로 이용할 따름입니다.”
획일화되어 가는 인간 사회, 좋은 책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빛엔 인간 사랑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를 써서 제16회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현직 한의사 오수완씨다. 전업 작가가 아닌 개업의가 세계문학상 작가에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은 수상한 작가의 정체였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자에 대해 “평범한 소재를 갖고도 이처럼 기발한 구상과 작품을 쓸 수 있었느냐”고 놀라워하면서 한목소리로 칭송했다. 본심이 끝난 직후, 휴대폰으로 연결된 주인공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차분했다. 경희대 한의대 졸업 이후 수련의를 거쳐 개업한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신인이 아닌 기성작가였지만 생각과 사고는 늘 새로웠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획일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지지했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세상에 책의 종류가 많을수록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이라도 이 세상에 있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의 볼품없는 책이 출판사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당신의 책이 이 세상에 있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지겹도록 천편일률적인 세상에 당신과 우리가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작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처절하면서도 통렬했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소설은 책들의 이야기, 그 책들을 둘러싼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에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작가란 그걸 어딘가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이다.”
과연 탁월한 표현이다. 세계문학상의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평가한 작가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예전부터 흠모한 이야기꾼들로 인해 오늘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국적별로 다양했다.
“20대에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좋아했던 작가들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프란츠 카프카…. 지금도 좋아하는 작가들을 떠올리자면 여전히 그 이름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일종의 각인효과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당시 좋아하던 다른 작가들에 대한 기억이 흐려진 지금도 그들의 글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여전한 건 내 기질과 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외에도 이탈로 칼비노는 한동안 열심히 찾아 읽었고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늘 되돌아와 다시 찾게 된다.”
글을 쓰는 종종 일상에서 평범함을 찾았던 작가는 지난 한 해 동안 책 한 권도 거의 읽지 않았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자신만의 구상을 찾기 위해 고독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20대 말부터 매년 100권 남짓을 읽어 왔는데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쫓기듯이 허겁지겁 읽고, 내용을 음미하기는커녕 책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음 책으로 돌진하는 독서습관에 스스로 지친 탓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는 ‘독서 안식년’이라 이름 붙였다. 안식년의 여름에는 모처럼 시간을 내 글을 썼다. 이번 세계일보 문학상에 낸 원고다.”
그는 2010년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로 중앙장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기성작가다. 올해는 등단한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나이를 열 살 더 먹었고 노안이 생겨 이제 안경이 없으면 책을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부지런히 글을 써왔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글쓰기는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겸손함을 잃지 않는 작가의 특성이 엿보인다.
“내 글이 다른 이들의 글보다 나아서 당선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문학상이 그동안 글을 쓰며 보낸 쓸쓸한 저녁에 대한 보상이라고, 글쓰기의 의기를 잃던 사람에게 보내는 격려라고 여긴다. 심사위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수상작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줄거리
사가본으로 운영된 도서관, 폐관이 결정되자 별난 책 기증자를 위해 카탈로그를 만드는데…
호펜타운 반디멘 재단 도서관의 다른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 책들을 위한 도서관’이다. 이름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직접 쓴 원고로 책을 만들어 도서관에 기증하기 시작했고 재정난과 장서 부족에 시달린 도서관은 기증받은 사가본으로 운영돼 왔다. 시 의회와의 협상 결렬로 재단은 도서관을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도서관 이용자들이 기증한 사가본은 가치가 없는 책으로 분류돼 모두 폐기될 운명이다. 도서관의 유일한 사서이며 도서관장 대리인 나는 책들을 원래의 기증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에 몰두한다. 그런데 가장 열정적이고 유별난 기증자였고 자칭 작가이며 책도둑인 빈센트 쿠프만(VK)은 책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가 기증한 책들은 모두 인터넷으로만 겨우 서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희귀본들이다. 나는 조력자인 레나 문(LM)과 상의해 VK와 그의 책들을 기념하기 위해 카탈로그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게 바로 이 책이다. 도서관 이용자들은 VK의 책들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얽혀 있다. 한 일본인 여자는 건강한 에로티즘을 찬미하는 일본인 사진작가의 작품집 수서를 검토하던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봤지만 내가 그녀의 딸을 사회복지사로부터 보호한 후로는 태도가 달라졌다.
비 오는 날이면 도서관에 찾아와 사가본 서가 앞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노숙자는 알고 보니 왕년의 유명한 라디오 디제이였다. 처음에 그를 질색하던 도서관 관리인 부부는 그에게 옷을 나눠 주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했다. 킬러 같은 차림을 하고 VK의 요리책을 빌리려던 남자는 사실은 도서관을 인수해 식당으로 개조할 생각을 품고 있는 요리사였고 희곡과 소네트를 즐겨 읽는 멋쟁이 노인은 알고 보니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다. 호펜타운을 떠났다가 돌아온 고등학교 동창은 조용하고 음울한,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소녀처럼 쾌활하고 분방한 시인이 돼 있었다. 어느 날 마약 상인처럼 보이는 청년이 VK의 책을 훔쳐가자 LM은 그를 쫓아가 책을 받아온다. 청년은 랩 가사를 쓰기 위해 그런 짓을 했다며 사과했다. 공교롭게도 폐관식을 하기로 한 날 재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재단 소유의 도서관 장서를 모두 회수해 간다. 책들이 떠난 텅 빈 도서관에 모인 사람들은 VK의 책들로 모의 경매를 하고, 낙찰받은 책을 서로 나눠 보며 그에 얽힌 추억을 나눈다. 나와 LM이 휴가를 다녀온 사이 VK의 책들이 모두 사라진다. 고장난 문을 뜯고 누군가 훔쳐갔지만 범인은 찾을 수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VK의 행적을 쫓던 중에 그가 자신이 기증한 책들을 모두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리고 제본해서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는 그 많은 책들을 직접 만들었을까. LM과 나는 다른 도시로 이사간다. 우리는 이삿짐 속에서 모의 경매에서 우리가 낙찰받은 책들을 발견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