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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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여고생 텔레그램 성범죄 표적 됐는데… 경찰, 신고접수 반려

신고서 반려하고 “채팅방 가서 싸워라” 조언 논란 / 본인도 모르게 정보유출된 10대 / 낯선 남자들 ‘성매매’ 연락 봇물 / 경찰, 피해 입증 자료 등 제출 요구 / 성매수 제안 남성과 접촉 강요해 / A양 “신상 나돌아 친구 보기 겁나” / 경찰, 성폭력 유통망 단속 ‘구멍’

“조건만남 하시는 분 맞나요?”

 

지난달 30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강남구에 사는 고등학생 A(19)양은 낯선 남성들로부터 갑자기 이상한 전화와 카카오톡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받았다. 이 남성들은 A양에게 ‘텔레그램(인터넷 메신저)방에서 보고 연락했다. 성매매하는 거 맞냐’는 질문을 던졌다. 놀란 A양이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묻자 이들은 ‘주식회사 피까츄(피카츄방)’라는 텔레그램방에 누군가 A양을 성매매 여성으로 속여 이름과 사진, 연락처, 집주소까지 공개했다고 답했다. A양은 “이런 식으로 신상 정보가 유출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일이라 눈앞이 캄캄했다”고 말했다.

 

한 남성이 보내준 익명의 텔레그램방 화면 캡처에는 ‘마 부장’이라는 아이디의 인물이 A양의 정보를 여러 차례 올리며 연락을 독려하기까지 한 정황이 담겨 있었다. 그 뒤로는 A양에게 ‘OO(야외성관계를 뜻하는 은어) 하고싶다’, ‘OO으러(강간을 뜻하는 은어) 가라’는 등 채팅방 참여자들의 성적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해당 채팅방에 참여 중인 사람은 2만3890명에 달했다. 텔레그램방 사진을 보내준 남성은 A양에게 ‘신고해도 아마 잡긴 어려울 거다. 텔레그램이 외국 소재라 경찰도 협조 잘 안 해줄 것’이라며 ‘이상한 연락이 많이 올 텐데 왜인지나 알고 있으라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A양은 다음날인 31일 신고를 위해 강남경찰서를 찾았다. 진정서 작성 후 담당경찰관을 만난 A양에게 돌아온 건 “신고 접수가 어렵다”는 답변뿐이었다. 피해를 입증할 증거자료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더 황당한 건 이어진 경찰의 조언이었다. A양은 “경찰관이 저를 보고 직접 그 텔레그램방을 찾아 들어가서 ‘이런 거 하지 마세요’하고 싸우라고 조언을 했다”며 “경찰도 찾기 어려운 걸 아직 학생인 제가 어떻게 혼자 찾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고 하소연했다.

 

신고 반려 후 A양은 결국 직접 본인의 정보가 퍼진 텔레그램방을 찾아 나섰다. 사건 이후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거나 집 현관 벨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결국 어머니가 며칠간 일을 쉬고 함께 있어줘야 할 정도로 불안을 느꼈지만 A양은 자신의 정보를 퍼뜨린 ‘마 부장’을 잡기 위해 텔레그램방을 통해 연락해온 남성들에게 ‘채팅방 링크를 알려줄 수 있나’, ‘마 부장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라고 직접 캐물어야 했다. A양은 “사진이 유포됐으니 나체사진 합성 같은 성범죄 타깃이 될지 모르는데 경찰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A양은 유출된 정보와 사진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을지 몰라 학교에 나가 친구들을 보기도 겁이 난다며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개학 후에도 학교 나가는 걸 당분간 미루기로 했다.

 

강남서 측은 신고 접수를 반려한 건 맞지만 직접 텔레그램방에 찾아가라고 한 건 증거를 수집해오라는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 해명했다. 강남서 관계자는 12일 “텔레그램 관련 범죄를 추적하기가 워낙 어려우니 증거가 더 필요해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신고 접수를 받고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청은 오는 6월까지 텔레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포함하는 4대 성폭력 유통망을 중점 단속할 계획을 지난 9일 밝혔다. 특히 텔레그램 이용 범죄의 경우 이달부터 운영 중인 ‘텔레그램 추적 기술적 수사지원 TF(Task Force·특별작업반)’를 통해 일선 경찰서를 지원한다고 했지만 이 같은 포부와 달리 일선 경찰서의 피해자 대응은 아직까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경찰이 텔레그램 성폭력 사건을 여러 차례 겪고도 아직까지 이렇게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경찰 수뇌부는 온라인 성폭력 퇴치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일선 경찰서와 손발이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

 

[알려왔습니다] 2월 12일자 ‘여고생 텔레그램 성범죄 표적 됐는데… 경찰, 신고접수 반려’ 기사 관련

 

본지는 지난 2월12일 위와 같은 제목의 보도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건 당시 담당 경찰관은 “피해자(여고생)가 당시 제시한 자료만으로는 텔레그램 성범죄의 표적이 된다고 볼 수 없었고, 그 외 특정 범죄의 수사 개시가 어렵다고 판단해 이를 피해자 및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한 후 반려했으며, ‘채팅방 가서 싸워라’는 조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