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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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편견 깨는 ‘어둠 속의 위로’ [밀착취재]

기사입력 2020-04-20 06:00:00
기사수정 2020-04-20 07: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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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장애인의 날… ‘블라인드 마음보듬사’ 만나보니 / 예민한 청각 활용한 대화 서비스 / 서울대 ‘봄그늘’ 특화 직업 개발 / 18년간 사회생활 포기했던 바다씨 / “안마사 외 다른 선택지 생겨 좋아” / 단순 노무직 내몰린 청각장애인들 / ‘고요한 택시’ 통해 직업 다변화

의자에 앉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은 빛 속에 살아온 사람에겐 녹록지 않은 환경이었다. 두어번 우당탕 소란을 피우며 부딪히고 난 후에야 가까스로 의자를 찾아 앉았다.

“오늘 어떤 고민이 있어서 찾아오셨나요? 마음속 이야기를 편안히 들려주세요”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바다(47·가명)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어둠이 이내 아늑하게 느껴졌다.

19일 서울 서초구 ‘블라인드 마음 보듬 강남점’에서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인 바다씨(왼쪽)와 봄그늘 협동조합 소속 대학생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제원 기자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19일 기자가 체험한 ‘블라인드 마음 보듬’은 어둠에 익숙하고 청각이 예민한 시각장애인의 장점을 십분 살린 대화 서비스다. 서울대 학생들로 구성된 ‘봄그늘 협동조합’에서 2018년 시각장애인 특화 직업으로 개발했다.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시각장애인들은 ‘마음보듬사’로 부른다.

어둠 속의 대화가 끝난 뒤 바다씨와 밝은 곳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20대 시절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시각장애가 생긴 후 18년간 일을 하지 못했던 바다씨는 ‘블라인드 마음보듬’ 일을 시작한 후 경제적 자립과 자존감 회복에 큰 성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바다씨는 “시각장애인이 비교우위를 갖는 예민한 청각을 활용해 상담하고 공감해주는 일이 ‘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며 “대표적인 시각장애인 특화직업인 안마사가 적성에 맞지 않아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있던 중 ‘마음보듬사’ 일을 알게 됐다. 이 일을 하며 시각장애인이 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자립할 수 있다는 걸 가족들에게 보여준 것이 제겐 정말 큰 의미였다”고 말했다.


봄그늘 협동조합의 김소은(22)씨는 ‘블라인드 마음보듬’의 취지를 신종 특화직업 창출을 통한 시각장애인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자립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시각장애인 직업 선택의 범위는 안마사로 한정돼있고, 그마저도 악력이 세거나 체력이 좋아야 하는 등 제약 조건이 많다. 상담 등을 전공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취업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며 “이런 조건 속에서 시각장애인의 장점을 살린 새 특화직업을 개발하는 것이 봄그늘의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봄그늘 소속 대학생 유연수(23)씨는 “‘마음보듬’은 시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을 직접 마주하고 마음을 보듬어주는 일이기 때문에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도 의미가 있다”며 “도움을 받는 존재로만 여겨지던 장애인이 오히려 비장애인을 돕는 과정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깨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지난해 발표한 ‘2019 장애인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15∼64세 장애인 129만여명 중 경제활동인구는 53.6%로 전체 인구 중 경제활동인구가 70%인 것과 비교하면 낮은 수치다. 15세 이상 시각장애인의 고용률은 41.9%로 15개 장애유형 중 4위를 차지했지만 종사하는 직업이 안마사 등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 ‘마음보듬사’는 이처럼 안마사로 한정돼있던 시각장애인 특화직업을 다변화할 수 있는 대안인 셈이다.


단순 노무직에 치중된 청각장애인의 직업 선택권을 늘려준 사례도 있다. 2018년 ‘따뜻한 동행 제1회 장애인 일자리 창출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한 ‘고요한 택시’가 그 주인공이다.

‘고요한 택시’는 청각장애인 기사가 운행하는 택시로, 목소리 대신 태블릿 기기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기사와 승객이 소통할 수 있게 한다. 현재 전국에서 26명의 청각장애인이 ‘고요한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고요한 택시’를 운영하는 코액터스의 송민표 대표는 “청각장애인 분들은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많고 직업 선택지가 적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고요한 택시를 기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요한 택시’ 운전사로 10개월간 일한 신연옥(58·여)씨는 “청각장애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겪었다”며 “택시 일을 처음 할 때는 거부감을 보이며 탑승을 거절하는 분들도 있었으나 이제는 많은 손님이 응원해주고 조용한 운행을 좋아해 주셔서 힘이 난다”고 말했다. 신씨는 “사회의 일원으로 장벽 없는 세상을 위해 오늘도 길 위를 달린다는 생각을 하면 이 일을 시작하길 잘했다고 느껴진다. 앞으로 더 많은 장애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밝혔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