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문을 열면 탄성부터 나오죠.”
덕수궁 석어당 2층에서 꽃이 한창일 때의 살구나무를 보는 건 관람객들의 감탄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난 6일 기자를 안내한 덕수궁관리소 이상희씨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꽃은 모두 졌지만 봄바람에 살랑살랑 잎을 흔드는 살구나무도 기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풍경으로 보였으나 역시 꽃이 한창인 이른 봄에 정말 예쁘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올해 봄 빼앗아간 풍경이다.
봄의 시작이자 절정이기도 한 꽃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봄이 아니어도, 그 계절의 꽃이 아니어도 우리를 매혹하는 풍경은 언제든 있다. 궁궐과 왕릉이 더욱 특별한 건 이런 풍경을 사시사철 넉넉하게 품고 있어서다. 그래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직원들에게 4대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종묘·조선왕릉의 가장 뛰어난 풍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궁능 업무 경험이 오래된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대표적인 경관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직원들에게 이 중 5개 이내에서 좋아하는 경관을 선택하도록 했다. 설문에 참여한 직원은 590명.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오래 궁궐과 왕릉을 접하는 궁능본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처음 해보는 설문을 정리한 이 기사는 언제,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궁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지를 정리한 안내서 정도가 되겠다.
◆궁능의 스타, 수목화초
궁궐, 왕릉만큼 멋진 나무와 꽃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없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엄격하고, 세심하게 관리해 온 덕분이다. 이런 수목화초 중에서도 도드라지는 ‘스타’들이 있다. 생김새가 특별한가 하면,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창경궁의 후원 연못 춘당지의 백송(白松) 삼형제는 187명이 선택해 궁궐의 7번째 경관으로 꼽혔다. ‘하얀 소나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지게 된 건 나이가 들면서 청록색의 줄기가 하얗게 변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을 조선의 사신들이 옮겨다 심었다고 한다. 지성균 해설사는 겨울의 맑은 날을 백송 감상의 적기라고 추천했다.
“주변 나무들의 잎이 지고 나면 백송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맑은 날에는 푸른 솔잎과 하얀 줄기가 정말 돋보이죠.”
건원릉의 억새는 어떤가. 이만큼 유명한 식물을 꼽기도 어려울 것 같다. 42기의 왕릉 중 능침을 억새로 덮은 곳은 건원릉이 유일한 데다, 그것이 태조 이성계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로 더욱 유명해졌다. 가을 저녁 무렵, 한창 자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노을과 어울리는 모습은 256명이 선택한 왕릉의 제1경이다.
나무와 꽃이 이뤄내는 빼어난 경관은 이것 말고도 많다. 왕릉의 두 번째 경관 ‘영릉 소나무와 진달래 숲길’(232명 추천)은 이른 봄이면 소나무 군락지 아래 진달래가 물결처럼 펼쳐져 장관이다. 사릉 주변 숲은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가 절경이다. ‘사릉의 노송과 물안개’는 144명의 추천을 받아 왕릉의 7번째 경관에 올랐다.
◆나무와 꽃, 새… 연못이 있어 가능한 눈호강
종묘의 연못 중 하나에는 수면으로 삐죽 나와 있는 작은 의자 같은 게 있다. 종묘관리소 황성호 주무관은 “오리 새끼들이 몸을 말리거나 쉴 수 있도록 직원들이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새끼들이 연못 밖으로 나와 놀다가 길고양이의 먹이가 되기도 해 안전하게 쉬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종묘의 오리들처럼 해오라기와 왜가리, 백로, 원앙, 흰뺨검둥오리 등 궁궐, 왕릉을 보금자리로 삼는 새가 의외로 많다. 연못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조경의 한 요소로,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혹은 풍수지리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과 나무, 꽃이 어우러지고 새들까지 더해지니 눈호강이 상당하다.
경기도 김포의 장릉 ‘연지와 저수지’는 156명의 추천을 받아 왕릉의 5번째 경관에 올랐다. 이곳은 6∼9월 연못을 가득 메우는 연(蓮)으로 유명하다. 때가 되면 찾아오는 철새들로 북적이기도 한다.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 신찬호 소장은 “연잎과 꽃이 어우러진 청량한 경관이 일품이고 원앙과 다양한 조류들의 서식지가 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장릉의 연지와 저수지를 알차게 즐기려면 추석 전후에 여는 연근 캐기 행사, 11~1월의 철새 먹이주기 행사를 활용하면 좋다.
궁궐의 제1경도 연못 주변의 풍경이 차지했다. 344명이 선택한 경복궁의 ‘경회루와 수양벚나무’. 봄이 되면 경회루 인근은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의 흰꽃, 가늘게 늘어진 능수버들의 녹색 가지에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람객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정릉 능침의 가장 특별한 서울 야경
한양은 조선의 수도였고, 궁궐은 한양의 중심이었다. 왕릉은 참배의 편리를 위해 도성에서 10리(약 4㎞) 밖, 100리(약 40㎞) 안에 조성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궁궐, 왕릉에서 도심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다.
9대 임금 성종 부부가 잠들어 있는 선릉, 11대 임금 중종의 정릉은 서울 강남의 한복판 삼성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정릉 풍경의 주된 이미지는 강남 도심과의 공존이다. 밤이 되면 주변 고층빌딩의 불빛과 마주하는데, 정릉 능침에서 보는 야경(112명, 왕릉 12경)이 특히 인상적이다. 서울 야경이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왕릉 능침에서 보는 것이라 특별하다. 봉분과 석물, 정자각 등 왕릉의 주요 구성물과 도심 야경의 다양한 조합은 과거와 현재가 뚜렷하게 대비되면서도 한데 섞인 듯한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한편으로 중종 임금의 긴 잠이 화려한 야경에 번잡스럽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2009년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전 실사를 나온 중국인 전문가가 이 풍경을 보고 도심 개발의 와중에도 능역이 지켜진 것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궁궐에서는 창덕궁 자경전 터에서 바라보는 도심 전경(162명, 궁궐 10경)이 근사하다. 창경궁에서 멀리 남산의 능선까지 한눈에 잡히는 풍경이 시원하다. 이곳에서 보는 서울 도심은 창경궁과 종묘, 남산의 푸른 숲에 둘러싸인 것 같아 푸근한 감상마저 일게 한다.
◆출입 어려운 궁능, 특별관람 활용해야
궁능유적본부 직원들이 추천한 궁궐, 왕릉의 주요 경관 중에는 일반 관람이 안 되는 곳이 제법 있다. 궁능의 각 1경으로 꼽힌 ‘경회루와 수양벚나무’, ‘건원릉 억새와 저녁노을’부터 제대로 보려면 출입이 통제되는 경회루 2층과 건원릉 능침 영역에 올라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의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재인 데다 장소 자체가 신성성을 가지기도 해 엄격하게 관리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당 경관을 보려면 특별 관람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관심이 있는 관람객이라면 궁능본부 홈페이지 등을 확인하는 수고 정도는 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경회루는 4∼10월 1일 3회에 한해 사전예약을 받아 특별관람을 실시한다. 덕수궁 석조전 특별관람은 10∼12월 사전접수를 해야 가능하다. 석어당은 살구나무 꽃이 만개하는 3∼4월에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건원릉은 억새가 절정을 이루는 10∼11월 능침을 개방한다. 1일 3회, 회당 40명의 사전예약을 받는다. 4월의 한식에는 억새를 정리하는 ‘청완예초의’를 갖는다.
어느 왕릉이나 능침 영역은 왕릉의 전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포인트지만 임금이 잠들어 있는 가장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출입이 어렵다. 주말에 한해 능침을 개방하는 선릉, 태릉, 의릉, 정릉 등을 방문하며 좋은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