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매체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비롯해 지난해 불거진 일본 불매운동 등으로 악화한 한일 관계를 두고 “한국인들은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빗대 자의적인 해석을 냈다.
매체의 혐한 주장은 12일 산업 통상 자원부가 “이달 말까지 수출 규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며 일본 정부에 촉구한 다음 날 터져 나왔다.
이 기사는 13일 오전(기준) 일본 포털에 배포돼 ‘인기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3일 해당 매체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 문화를 접한 뒤 한국이 주장하는 혐오는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작가 ‘신시아 리’라는 인물의 저서 ‘왜 한국인은 빌린 돈을 갚지 않은 것인가. 한국인에 의한 한일 비교론’이라는 서적을 참고로 했다며 지금 한일 관계는 한국이 일본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쳤다.
매체는 “돈을 빌려주고 돌려주지 않은 경험은 한국의 성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닐까 생각된다”면서도 “그러한 데이터는 없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길 꺼냈다. 개인적으로 빌려준 돈을 못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한국사람 모두=돈을 안 갚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근거 없는 엉터리 주장이란 걸 알 수 있지만 더 황당한 건 이를 냉각된 한일 관계에 빗대 “한국정부의 위안부 협정 파기는 돈을 갚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논리가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지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을 확인하고 합의 후 국제사회에 일본에 대한 비난·비판 자제 등을 한국에 요구했는데 이를 근거로 ‘한국이 합의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우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해와 동의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7년 출범 직후 외교부 장관 직속으로 발족한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당시) 2015년 한 해에만 모두 15차례 이상 피해자 및 관련 단체를 접촉했다”고 기술했지만 정부 측과 피해자 단체가 협의를 진행했지만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확인, 국제사회 비난·비판 자제 등 한국 쪽이 취해야 할 조치가 있다는 것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고 돈의 액수에 관해서도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았다”며 “결과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매체는 “일본이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라고 하면 한국은 ‘조약이나 합의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한국은 국가 간의 약속이나 국제법보다 더 중요한 ‘정의’가 있다며 일본과 한국은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함께 발전해야 할 관계지만 일본이 패하고,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양국 관계가 파괴되어 버린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들을) 조금 바꿔보면 한국이 국제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일본이 한국의 정의를 지켜라’라고 하는 것”이라며 “지금의 한일 관계는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과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강조했다.
매체는 ‘오래 전부터 그랬다’는 근거로 한국인 강제 징용공 문제를 언급하며 “50년 이상 지난 현재 한국은 ‘한일 청구권 협정’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꼬집었다.
매체의 주장은 일본 정부 입장을 빠짐없이 대변하고 있는 반면 우리 대법원판결은 무시한 채 돈을 갚지 않는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며 합리화하고 있다.
강제 징용 문제는 일본 측 주장처럼 국가 간 합의는 이뤄졌지만 2018년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을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에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로 간주해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판결은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일본은 대가를 지불했지만 한국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모방하더니…
매체는 “한국은 교육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시작된 나라”이라며 “일본을 롤 모델로 성장한 국가”라고도 주장했다. 이어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을 모방해 “약속을 지켜야 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 등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지만 (정치적) 한일 관계에서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매체는 이러한 이유를 한국인의 ‘체면’과 ‘수치’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인 특유의 자존심 의식(매체 주장)’은 돈을 빌려준 사람(일본)에게 ‘나쁜 짓을 했다’ 또는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을 들게 해 넓게 보면 수치의 개념”이라며 “돈을 빌리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체면이 깎였다). 돈을 반환하면 마이너스가 된다. 그러나 지불하면 이러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없앨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람은 돈을 갚지 않는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며 길게 말했지만 요약해보면 일본과 한 약속을 지키란 말이다. 그러면서 약속 지키지 않으니 한일 관계가 악화했다는 주장이다.
한일 갈등을 두고 이 매체나 일본 정부는 양국 정상간 합의로 마무리됐으니 더는 논의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 피해자들의 동의나 합의 보상 문제 등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합의는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닌 양측이 동의로 이뤄지는 것이다. 일본은 이 점을 인식하고 올바른 대응에 나서야 한다.
한편 일본의 일부 매체들은 판매 수익 등을 노려 이같은 혐오성 기사, 주장 등을 쏟아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기사는 일본의 대형 포털에 배포돼 인기 기사에 올랐다. 평범한 일본 국민들이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로 한국에 대한 혐오가 커지는 건 아닐지 우려된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사진=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