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이 있어서 월급 받으면 바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안 된다면 주문 취소하세요. 수락해주시면 리뷰 이벤트 참여할게요”
“저녁에 돈 드릴게요. 음식 먼저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지난 1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주문 어플 신종 거지 등장’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게시물에는 한 사업주가 음식 배달 주문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주문 받은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 포함됐다.
사진 속 문제의 주문자는 ‘요청사항’에 “사정이 있어 5월10일 급여 받고 배달비 포함 바로 계좌이체 하면 안 될까요”라며 “안된다면 (주문) 취소 부탁드립니다”고 부탁했다.
이어 “(음식 보내주면) 리뷰 참여할게요”라며 후기 참여를 내건 제안까지 했다. 보통 음식 알러지나 구성메뉴 변경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요청사항과는 사뭇 달랐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이 주로 활동하는 이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오자 반응도 뜨거웠다. 글을 본 누리꾼들은 “맞다. 우리 가게에서도 너무 자주 있는 일이다”, “1인분 주문하고 2인분 같은 음식 달라는 사람이 있어 취소 버튼을 눌렀다”, ”제 가게에도 이런 주문이 너무 자주 들어온다. 2번 정도 취소해도 계속 반복해서 주문하는 악질이다”고 주장했다.
◆ ‘주문 거래’에 ‘주문 취소’로 대응하면 결국 손해는 사장님 몫?
16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구매자가 이러한 요구를 당당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문 시스템 구조가 소비자 위주로 짜였기 때문이다. 구매자는 ‘만나서 결제’ 혹은 ‘앱에서 결제’ 등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때 ‘만나서 결제’를 선택하면 돈을 내지 않고도 최종 주문단계까지 갈 수 있다.
이후 요청사항에 “돈을 나중에 드리겠다”고 일종의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다. 글을 확인한 자영업자는 ‘주문 거절’, ‘사업장 사정으로 주문 취소’ 등의 버튼을 눌러 한 차례 거절할 수 있지만, 반복되면 오히려 페널티를 받는다.
배달 전문 어플리케이션 중 하나인 ‘배달의 민족’의 담당자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장님부터 다양한 불편 사항을 접수 받았지만 아직 이런 사례는 구체적으로 확인된 적이 없다”며 “이런 주문의 경우 사업주가 ‘1회’ 주문 취소하는 것은 평점에 전혀 영향이 없지만, 사정 등으로 배달 불가능 등 거절을 반복하면 내부 패널티 정책에 따라 광고차단 및 계약해지 처분이 주어질 수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이와 같이 외상하겠다는 손님의 억지 요구에도 사업주는 업체 운영에 지장이 생길 수 있는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 해당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런 손님을 계속 거절했더니 평점 테러, 후기 테러, 주문 테러를 일삼더라”라는 경험담도 일부 올라왔다.
◆ ‘만나서 결제’의 함정…최종 피해는 최전선의 ‘배달 기사’
주문자와 업주 사이에만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 ‘만나서 결제’의 함정에 빠지는 또 다른 피해자는 배달 기사다.
부산의 한 배달 전문 업체에서 기사로 일하는 A씨도 세계일보에 “사실 이런 손님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배달 앱 회사도, 음식점도 아닌 우리 배달기사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요청사항에 그런 제안을 적은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라며 “그런 말도 없이 당장 음식을 가져가면 ‘저녁에 음식값을 준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 자리에서 주문한 음식을 안 주면 저녁에 돈 준다는 사람과 싸워야 하고, 결국 다음 배달 시간이 지체되니 어쩔 수 없이 음식만 먼저 건넨 뒤 다른 곳으로 배달하러 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매주 2~3명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데 대부분 돈을 주지 않는다”며 “결국 배달 기사가 자기 돈으로 음식 값을 지불하고, 그 동네 기사들끼리 번호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 사람의 주문을 받으면 안 된다’는 정보 공유의 방식으로 나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용카드, 계좌이체 등의 방법을 이용할 수 없는 손님을 위해 마련된 결제 방법인데, 이를 악용한 일부 주문 손님들의 행동 탓에 애꿎은 이들만 피해를 보는 셈이다.
◆제 3자 피해가 생기는 건 불합리…‘선주문 후결제’ 방법은 개선 필요
전문가들은 일부의 몰상식한 행동에서 오는 피해를 줄이려면 결제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옥경영 숙명여대 교수(소비자경제학)는 “지금의 ‘현장 결제’ 시스템은 과거의 ‘전화 주문’ 방식과 유사하다”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배달 주문은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뤄지고 있는 거래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에는 온라인 페이 도입, 안전 거래 등 거래의 신뢰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물리적·시스템적 조건이 잘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제 3자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기는 건 불합리하다”며 “과거의 통용되던 거래 방식인 ‘선주문 후결제’ 즉, 주문 후 현장에서 결제하는 시스템은 이제는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배달 주문 시스템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며 “결국 주문 거래의 주체인 사업주, 배달기사, 소비자 간의 신뢰와 거래 안전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최서영·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