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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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학문 권장의 매체 ‘책거리’… 현실적 욕망 드러내다

호림박물관 민화특별전 ‘서가의 풍경’ / 고고한 책과 통속적 물건 그린 정물화 / 학문 숭상을 강조한 유교문화의 산물 / 중국서 수입한 도자기·문방구 등 그려 / 오방색 줄 표현 신분 상승 기대감 반영 / 토끼·수박·참외 등 자손의 번성 기원도 / ‘효제충신’ 문자도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 / 제주도서 유행… “양반행세 욕구” 해석

호림박물관 3층 전시실은 책들로 빽빽한 서가가 늘어선 서점 혹은 도서관을 연상시킨다. 애서가를 자부하는 관람객이라면 살짝 뿌듯해질 수도 있는 풍경이겠다. 박물관이 7월까지 여는 민화특별전 ‘書架(서가)의 풍경-冊巨里(책거리)·文字圖(문자도)’의 첫번째 전시실. 12점의 책거리 그림으로 채워진 전시실은 책거리에 유난한 애착을 보였던 정조가 인용하곤 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책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책거리가 학문을 숭상한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궁중에서 시작한 책거리가 민간으로 확산하면서, 이 그림은 조선인들의 현실적 욕구를 반영하며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켜 갔다. 효도와 충성으로 대표되는 유교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된 문자도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책거리, 문자도에서는 국가 이념으로 강조된 유교적 이상에만 짓눌리지 않고,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욕구를 표현하려 한 사람들이 보인다.

◆출세·장수·다산…현실적 욕망의 매체 책거리

호림박물관의 민화특별전에 출품된 책거리 병풍. 책으로만 채워진 서가를 표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우리나라 책거리의 역사는 정조와 함께 시작했다. 세종과 더불어 공부를 가장 좋아한 조선의 군주로 꼽히는 그는 업무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때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를 두어 아쉬움을 달랠 정도였다. 정조의 적극적인 책거리 제작과 활용은 당시 선비들이 통속적인 글을 읽고 쓰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추진했던 ‘문체반정’(文體反正)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림을 통해 학문의 전범인 경전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정조가 좋아한 책거리가 어떤 모습인 지는 전하는 것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번 전시회의 출품작 중 하나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거리 10폭 병풍을 통해 짐작할 수는 있다. 이 책거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서가 안이 책들로만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전하는 대부분의 책거리가 책과 함께 중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도자기나 문방구, 서양 물품, 출세, 장수, 다산 등의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물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있는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1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이는 6폭 병풍에는 책 중앙에 음양오행설을 반영한 오방색의 줄을 표현했다. 관복에 많이 쓰인 오방색은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다. 책거리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공작깃털, 두루마리, 붓, 문서 등도 입신출세의 기원을 담고 있다.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토끼를 그려 오래 살기를 기원하거나, 수박이나 참외 등 씨가 많은 과일을 표현해 자손의 번성을 바랐다.

책과 함께 다양한 길상 상징, 도자기 등을 그렸다. 호림박물관 제공

화려한 색상의 도자기가 많이 표현된 것에서는 왕실과 사대부의 이중성이 읽히기도 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다채색 도자기가 유행했던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백자나 청화백자가 발달했다. 이는 기술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유교적 이념의 하나인 검소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책거리는 이런 태도와 완연히 다른 조선 지배층의 현실적 취향을 보여준다. 민화 전문가인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한 논문에서 “(민화로서 책거리는) 틀에 박힌 반듯함보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학문보다는 길상적인 염원과 생활의 정감을 내세웠다”며 “민화 책거리에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학문을 강조한) 본래의 의미마저 위협할 지경”이라고 평가했다.

◆제주도, 문자도로 드러난 신분상승의 욕구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의 글자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문자도는 유교적 이념을 책거리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워 창업한 국가지만 그것이 실생활까지 지배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교적 덕목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삼강행실도’ 등의 편찬이었고, 후일에 이런 교육용 교재의 역할에 문자도도 한몫했다.

초기 문자도는 유교의 각 덕목을 대표하는 옛이야기를 표현한 ‘고사인물화’를 문자 안에 그려 넣는 형식이었다. 맹종이 한겨울에 어머니께 드린 죽순을 구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니 눈 속에서 죽순이 솟아났다는 ‘맹종읍죽’, 계모에게 줄 잉어를 구하기 위해 체온으로 한겨울의 얼음 연못을 녹이려 했다는 ‘왕상빙리’ 등의 고사가 표현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문자도는 고사인물화 대신 각 고사를 대표하는 상징물과 결합했다. ‘효’(孝)자를 잉어, 죽순 등으로 장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상징물만으로도 각 덕목을 전하는 고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유교가 정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도의 문자도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유교문화가 전국에 확산,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호림박물관 제공

문자도의 유행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제주도다. 가장 남쪽 변방 제주도는 건국 후 300여년이 지나고도 유교와 토속신앙, 불교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면 유교가 정착되면서 문자도가 크게 유행했다. 제주도의 문자도는 대체로 제주도의 자연과 물산을 표현한 상·하단, 글자를 그린 중단의 3단으로 구성됐다. 특히 양반의 전유물처럼 인식된 병풍으로 제작된 문자도가 많았던 것은 “병풍을 치고 ‘문자 꽤나 쓰는’ 양반 행세를 하고 싶은 서민들의 욕구가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박물관 표수아 학예연구사는 “민화는 사람들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는 가장 한국적이고, 대중적인 그림”이라며 “책거리와 문자도는 학문, 출세, 유교 문화 등의 상징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는 장르”라고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