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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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고통 없이 열리는 열매는 없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다. 실직한 사람들도 많고, 생업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수입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일 것이다. 중국의 명재상 관중은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했다. 생업의 압박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조차 모르게 만든다.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십여년간 어느 감독의 PD 일을 해오다 새 영화 촬영 시작 전 감독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자, 나이 마흔에 실직자가 된 찬실(강말금)의 위기를 그린 영화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과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에 이어 해외초청도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용달차도 못 올라가는 산동네로 옛 동료와 함께 이삿짐을 이고 지고 올라가던 찬실이 아랫동네를 내려다보며 “완전히 망했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당장 생활비도 어려운 상황이 된 그녀는 친한 후배 배우 소피(윤승아)가 가정부가 다쳐서 못 오게 됐다고 말하자 바로 소피 집 가정부로 일하겠다고 한다.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마흔이 된 찬실은 소피의 프랑스어 가정교사 연하남 김영(배유람)에게 끌리게 된다. 그가 시나리오를 쓰는 단편영화 감독이라고 하자 찬실은 혼자서 연애 감정을 키워간다. 함께 먹을 도시락도 준비하고 그에게 백허그까지 감행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서두르던 찬실만 민망한 상황이 돼 연애도 실패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찬실의 힘든 상황을 코믹하게 그림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이 영화는 판타지 장르로 분류돼 있다. 영화광인 찬실 앞에 ‘아비정전’에서 흰 러닝셔츠와 트렁크만 입고 거울 앞에서 맘보춤을 추던 장국영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을 장국영(김영민)이라고 소개하는 남자가 찬실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장국영 귀신은 영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는 그녀를 위로하며 흔들리는 그녀를 붙잡아 준다. 찬실은 그가 귀신인 것을 알지만 그가 그녀의 영화에 대한 첫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이므로 그를 떠나보내기 싫다. 감독은 빛날 찬, 열매 실이라는 이름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그녀가 결국은 빛나는 열매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누구나 힘든 때는 있다. 그러나 힘겨운 시기가 찬실이라는 이름값을 만드는 기회라고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자.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