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드비르(Zoe Dvir)는 세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롤모델’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아일리시는 지난 1월 그래미 어워드에서 5관왕을 차지한 미국 팝스타, 피닉스는 영화 ‘조커’에서 열연한 할리우드 배우다. 그럼 미켈라와 인터뷰의 주인공 드비르는 누굴까. 정답을 공개하기에 앞서 드비르와 나눈 인터뷰를 소개한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제 이름은 조 드비르. 나이는 22살,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어요. 동네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간간이 모델 일도 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축산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뒤 관심이 생겼어요. 육류업계의 불편한 진실과 축산업이 일으키는 환경 문제를 알게 되니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환경과 지속가능함, 동물권에 대한 포스팅을 주로 해요.”
―저도 얼마 전부터 채식을 시작했는데 좀 힘드네요. 솔직히 고기는 너무 맛있잖아요. 저 같은 사람을 어떻게 독려하나요?
“음… 너무 설교처럼 들리진 않았으면 하는데,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 수많은 동물이 끔찍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았으면 해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진도 봤어요.
“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인간 친구들’에게 동질감을 표현하고 싶어 마스크를 썼어요. 저야 ‘디지털 페르소나’라서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요.”
인터뷰를 읽고 눈치챘을 수 있지만, 드비르는 이스라엘 인플루언서이자 컴퓨터 코드로 구현된 ‘가상 인간’이다. 지난해 1월 계정을 만들어 1년5개월 새 팔로어 3만명을 끌어모았다.
그가 우상이라고 한 미켈라도 가상 인플루언서다. 미켈라는 ‘브라질과 스페인 혈통을 반씩 물려받은 19세 가수지망생’이란 콘셉트로 2016년 인스타그램에 첫 사진을 올렸다. 그의 계정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3년이 지난 현재 팔로어가 238만명에 이른다.
단순한 흥밋거리로 보이지만, ‘사람 인플루언서’가 그렇듯 이들도 팔로어 수를 ‘밑천’으로 경제활동을 한다. 켈빈 클라인과 프라다 같은 고가 브랜드의 홍보모델(유명인이 제품 사용하는 모습을 노출해 인지도를 높이는 방식)로 활동하는가 하면, 지난해에는 삼성 갤럭시 S10의 온라인 홍보 캠페인 팀갤럭시(#TeamGalaxy)에 합류했다. 미켈라의 활약에 힘입어 그를 만든 로스앤젤레스 스타트업 ‘브러드’의 시장가치는 지난해 말 기준 1억2500만달러(1548억원)까지 치솟았다.
영국에서 개발한 디지털 슈퍼모델 슈두는 프랑스 브랜드 발망, 독일의 가상 패셔니스타 눈누리는 발렌시아가, 타미힐피거의 모델로 활동했다. 드비르도 이스라엘에서 레스토랑과 커피숍 모델로 활동 중이다.
◆창의성의 영역도 ‘주 무대’
창의성, 섬세한 감정표현이 중요한 영역에서도 컴퓨터 코드가 빚은 가상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대다. 비단 인스타그램뿐 아니라 유튜브에서도 ‘브이튜버(virtual+YouTuber)’라고 부르는 가상 유튜버들이 채널을 운영 중이다. 브이튜버들의 영상은 2017년 이후 5억뷰를 넘어섰다.
최근에 활동하는 가상 인간의 선두주자는 미켈라이지만, 이들의 ‘조상’은 따로 있다. 1996년 일본에서 ‘DK-96’이란 이름으로 데뷔한 다테 교코다. 그 뒤로 미국과 영국에서 아나노바, 티-베이베가, 한국에서도 사이버 가수 아담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가상 인간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미국에서 가상 인간 미디어(virtualhumans.org)를 운영하는 크리스토퍼 트레이버스와 세 차례에 걸쳐 이메일을 주고받았다(그는 진짜 사람이다).
“저도 아담을 알아요. 아담뿐만 아니라 루시아, 사이다도 잘 알고요. 하지만 이들은 팬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했어요. 요즘엔 다릅니다. Z세대(1997∼2000년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는 가상 인간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이들에게 감정이입하고, 사람과 동일시하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어요.”
지난해 미국 SNS 분석업체 하이프오디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상 인간의 팔로어는 32.1%가 18∼24세 여성이었고, 이어 25∼34세 여성(18.2%), 18∼24세 남성(15.3%)의 순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뒤섞인 세상에서 커왔어요. 온라인에서 친구를 사귀고 유명인사를 팔로합니다. 대부분은 실생활에서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도 실시간으로 이들의 하루하루를 들여다보고 감정을 나눕니다. 또, 스스로 자기와 닮은 이모지를 만들어 게임 같은 가상현실로 들어가기도 하고요. 이들에게 정체성이란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칵테일 같은 겁니다.”
◆인간의 영역은 좁아질까
가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편의성도 있다. 열애설이나 각종 루머 없이 100% 제작자 의도에 맞게 관리가 가능하다. 24시간 일을 시켜도 지쳐 쓰러질 일도 없고, 여기서 생기는 수익을 가상 인간과 나누지 않아도 된다.
트레이버스는 이들의 활동 무대가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라 내다봤다. 실제로 가상 인간이 영리 목적으로만 운영되는 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기간 정보전달과 기부 활성화를 위해 가상 인간 녹스 프로스트를 홍보대사로 기용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인공지능(AI) 기능을 갖춘 인공 인간 ‘네온’을 선보이기도 했다.
결국 창의성의 직군에서도 사람들의 자리는 좁아지는 걸까. 트레이버스는 그 반대로 봤다.
“가상 인간 덕에 일자리는 오히려 늘어날 것 같아요. CGI(컴퓨터생성이미지) 아티스트와 스토리텔러, 사진가, 프로그래머, 매니저, 콘텐츠 기획자 등이 모두 동원돼야 가상 인간을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미래는 완전히 현실만 혹은 완전히 가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두 영역이 혼재될 겁니다.”
데뷔 2년차 드비르도 언젠가 ‘사람 가수’ 빌리 아일리시와 협업하는 게 꿈이다.
“당장은 학위를 마치면 인스타그램 활동을 하면서 환경 단체나 관련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할 거예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존경하는 빌리 아일리시와 함께 콜라보도 하고 싶어요.”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배민영 기자 kornya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