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하다. 졸지에 친일파가 돼버렸다. 사연은 이렇다. 달포 전 지인들과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다음날 지인들이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한 모양이다. 옆 테이블에서 한 여성이 전날 내 자리를 가리키며 “어제 저기 앉은 분한테서 정말 감동적인 말을 들었다”고 하자 가게 주인이 이렇게 반박했다는 것이다. “아, 말도 마세요. 그 사람 친일파예요!” 지인과 나눈 몇 마디 나라 걱정이 친일의 증좌로 둔갑한 것이다.
친일파로 정죄하려면 그 사람의 행적이나 주장 등 사실관계 파악이 먼저다. 솔직히 나는 일본에 투자한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일본의 과거 악행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국민의 한 사람이다. 나의 조부는 일제 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사흘 전에 시위를 벌이다 계엄군에 끌려가 가혹 행위를 당했다. 석방된 후에도 시위전력 때문에 10년간 취업문이 막히는 고통을 겪었다. 집권층의 비행을 감싸는 가짜 진보세력은 이런 객관적 사실엔 관심이 없다. 사람을 피아로 나눈 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친일파다.
국민을 두 쪽으로 가르는 진영 정치는 온 나라에 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진다. 조국 전 법무장관 사태 때보다 변종의 형태와 폐해가 훨씬 다양하고 심각하다. 심지어 일본군에게 만행을 당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까지 ‘토착 왜구’ 딱지를 붙인다. 위안부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던 여권 인사는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의원의 비행을 지적하자 정신 이상자로 몰았다. 그들에게는 진실이 중요치 않다. 윤미향 편이냐, 할머니 편이냐만 따질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독립지사가 환생한다고 해도 진영의 올가미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해방 후에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던 김구 선생마저도 자칫 친일파로 매도당할 판이다.
후안(厚顔)의 윤미향은 끝내 금배지를 달았다. 국민은 앞으로 상식이 무너지고 정의와 불의가 뒤바뀌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더 많이 더 자주 분노를 삭여야 할지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힘든 서민들에게 이런 날벼락이 없다. 국민 노릇하기가 진짜 힘들다는 푸념이 쏟아지는 이유다.
예전에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애국한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애국도 줄을 세운다. 까딱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친일파로 손가락질당하기 일쑤다.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스스로 심리적 무장을 해야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 심한 고통을 받고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죄를 지은 사람은 꽃길을 걷고 죄 없는 다수가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나.
비상식적인 진영 정치가 판을 치는 것은 양심에서 나오는 옳음보다 개인과 정권의 이익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이익은 사람마다 다르다. 윤미향의 이익이 다르고, 조국의 이익이 달라 갈등과 분열이 그칠 새가 없다. 이익으로 따지면 나라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혼탁한 세상이다. 그러나 양심은 하나다. 좌우와 보혁이 없다. 양심을 따르면 시시비비가 명확히 가려지므로 국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 통합과 공존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얘기다. 국민통합을 외친 문재인정부에서 갈등이 극심한 것도 양심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심과 이익은 독립지사와 친일파를 가르는 기준이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견리사의(見利思義)’란 글을 남겼다. 이익을 보면 먼저 양심을 좇아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반면 친일파는 양심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좇았다. 만약 오늘날 토착 왜구가 존재한다면 육신의 안위를 위해 영혼을 판 좀비들이 진짜 친일파가 아니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 원칙의 기준은 양심”이라고 적었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다면 원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설파했던 그의 양심은 윤미향 앞에선 침묵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양심을 의심하고 있다.
배연국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