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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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의 세계·부정형의 원… 무심한 아름다움에 취하다

입력 : 2020-06-12 03:00:00
수정 : 2020-06-11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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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展 / 설백·유백·회백 등 미묘한 흰색의 멋 / 조선 유교사회선 청렴·절제의 상징 / 완벽한 원이 아닌 둥그스름한 생김 / 넉넉함과 여유, 비움과 공허의 미덕 / 강익중·구본창 등 9명의 작가 참여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통한다. …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 한국 현대미술의 대명사 수화 김환기(1913~1974) 작가가 남긴 달항아리에 대한 찬사다.

 

달항아리는 40∼50cm의 둥그런 몸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조선시대 대형백자를 일컫는 말이다. 희고 깨끗한 살결과 둥근 생김새가 보름달을 연상시켜 달항아리란 이름이 붙었다.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18세기 전반에 주로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 백자를 통틀어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최형욱 달항아리(회화)

백자는 조선시대(1392∼1910) 초기부터 500년 동안 만들어진 한국 고유의 작품이다. 조선왕조는 도덕과 절약, 겸손과 검소를 강조하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백자가 지닌 꾸밈없는 순수함과 단순한 모습은 이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달항아리의 매력은 색과 형태가 주는 감수성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소재로 작업을 펼치는 이유다. 사실 달항아리 같은 순백자 항아리는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어서 더욱 그러하다. 흰색은 전 세계 공통으로 하늘, 천상, 허공, 순결, 순종, 희생, 관대한 허용의 보편적 감수성을 지닌다. 느낌은 깨끗하고 자연스러우며 또 모든 색 가운데 가장 순수하다. 하얀 웨딩드레스, 백의의 천사 간호사복, 수도원의 수도사복이 흰색이다. 천사도 백색 옷을 입고, 신선은 눈썹과 수염까지도 하얗다. 초월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상에서 오는 빛의 색을 흰색으로 가름했다. ‘희다’는 중세국어로 해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됐다. 흰색은 다른 색을 생생하게 살려주고 풍성하게 감싸 안을 줄 안다.

오만철 달항아리(도자부조)

달항아리는 백색이라도 눈빛 같은 설백(雪白), 젖빛 같은 유백(乳白), 잿빛이 도는 회백, 한지(韓紙)의 지백(紙白), 모시나 옥양목, 광목과 같은 그 미묘한 흰색의 멋을 담고 있다. 이런 색들은 조선의 유교사회에선 청렴과 절제를 상징했다. 고대 로마에서 관직에 출마하는 남자가 걸치는 흰색의 ‘토가’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중세유럽 일부 성화의 흰색 후광과 성직자들의 흰옷은 고결함과 희생을 뜻한다. 지구촌 어디서나 백색 옷은 하늘 앞에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드러낸다는 정서를 지닌다.

구본창 달항아리(사진)
전병현 달항아리(한지부조)

흰색은 이처럼 ‘색상’을 넘어 시대마다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됐다. 흰색의 역사는 빛으로 순수함을 담으려 했던 인간 여정이다. 무색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흰색이 무색을 대신하면서 비움, 공허를 표하기도 했다. 달항아리는 비움과 공허의 미덕을 의미하기도 한다. 흰색으로 그 존재 의미를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생김새도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이다. 완벽한 원은 폐쇄, 닫힌 모습이다. 하지만 원에 가까운 둥그스럼은 열린 구조다. 소통의 단초가 된다. 인간은 규격화된 형상보다 비정형의 모습에서 마음을 저울질하고 비로소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동되는 지점으로, 외부세계에 관여하는 기본 방식이기도 하다. 달항아리의 비정형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유다. 양감을 더욱 풍부하게 부각시켜 준다. 달항아리가 내밀한 차원을 열리게 해주는 구조라는 얘기다. 우리 감성의 보물창고를 열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지와 상상력은 우리 오관에 날카로운 촉수를 만들어 준다. 최상급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것을 떠나 상상적인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용순 달항아리 (도자)

강익중, 구본창, 김용진, 석철주, 신철, 오만철, 이용순 전병현, 최영욱 등 9인은 달항아리의 기호에 끌림을 당한 대표적 작가들이다. 도자기 달항아리 작가부터 캔버스에 달항아리를 그리는 작가, 철심과 도자부조, 한지부조로 달항아리를 형상화하는 작가, 사진으로 달항아리의 내적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작가 등이 한자리에 모여 달항아리에 대한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전이다. 30일까지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갤러리 나우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