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15일 본회의를 열고 법제사법위원회 등 6개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임을 강행함에 따라 21대 국회가 시작부터 파행으로 치닫게 됐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여당의 원 구성 요청을 받아들여 미래통합당이 제출하지 않은 상임위 위원 명단을 강제 배정하는 강수를 뒀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본회의 직전 열린 의총에서 법사위원장 윤호중, 기재위원장 윤후덕, 외통위원장 송영길, 국방위원장 민홍철, 산자위원장 이학영, 복지위원장 한정애 의원을 각각 내정한 뒤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에 나섰다. 본회의에는 176석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6석의 정의당, 3석의 열린민주당, 각 1석의 기본소득당·시대전환 등 범여권 의원 187명만 참석했다.
박 의장은 본회의에 앞서 통합당에 6개 상임위에 대한 상임위원 배정을 요구했지만, 통합당이 제출을 거부하자 위원직을 강제 배정했다. 국회법 48조 1항 ‘상임위원 선임 요청 기한까지 요청이 없을 경우에는 의장이 상임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는 조문에 의한 결정이었다.
본회의 개의 후 박 의장은 통합당의 보이콧 속에 일부 상임위원장을 먼저 선출하게 된 데 대해 “법으로 정한 개원일이 이미 일주일 지났다.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하고 송구스럽다”며 “여야 간 협상에 나름 사정이 있겠지만 코로나19 위기와 남북관계 위기에서 정치권의 어떠한 사정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민생을 돌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본회의 개의 이유를 밝혔다.
통합당은 민주당이 상임위원장 선출을 강행하자 국회 본회의장 문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며 강하게 반발했다.
주호영 원내대표 등 통합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입장하는 민주당 의원들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파괴하는 의회독재 민주당은 각성하라’, ‘말뿐인 협치 민주주의 말살하는 문재인은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민주당 의원들은 통합당 의원들의 구호 속에 별다른 반응 없이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민주당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을 비롯한 문재인정부의 검찰개혁 입법이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됐다.
민주당은 지난해 패스트트랙(신속 안건처리)을 통해 공수처 설치법, 검경 수사권 조정법 등 검찰개혁 법안을 처리했고, 오는 7월 공수처 출범을 위한 공수처장 인사청문회법과 국회법 개정 등 후속 입법 과제를 남겨놓은 상태다. 민주당이 표방한 ‘일하는 국회’를 위한 추진력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쟁점 법안의 경우 소관 상임위를 통과하더라도 제1야당이 위원장을 맡아온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에 걸려 처리가 지연되거나 발목 잡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민주당은 법사위에 박범계 박주민 백혜련 송기헌 김남국 김용민 소병철 의원 등 법조계 출신 의원을 대거 배치했다. 당초 법사위를 희망한 민주당 황운하,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은 포함되지 못했다.
박 의장은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은 그동안 체계·자구심사권을 활용해서 법사위가 월권적인 행위를 해왔던 것을 제도적으로 개선할 것을 강력히 요청해왔으며, 민주당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빨리 제도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통합당 원내지도부의 동시 사퇴 표명으로 남은 상임위원장 선출을 비롯한 향후 국회 의사일정에 파행이 예상된다. 여당 입장에서는 법사위 등 6개 상임위원장을 단독 선출했지만, 다음 본회의가 있는 19일까지 남은 12개 상임위에 대한 협상 창구가 사라져 원 구성 협상과 관련한 셈법이 복잡해졌다.
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본회의 의사진행발언을 마친 뒤 열린 의원총회에서 “지금까지 제1야당이 맡아왔던 법사위를 못 지켜내고 민주주의가 이렇게 파괴되는 걸 못 막아낸 책임을 지겠다”면서 이종배 정책위의장과 함께 사퇴의 뜻을 밝혔다. 통합당 의원들은 주 원내대표의 책임이 아니라며 사퇴를 만류하고 재신임을 결의했지만 주 원내대표는 “사퇴 의지가 확고하다”며 사의를 철회하지 않았다. 주 원내대표의 갑작스러운 사퇴 결정에는 협상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있지만 협상 과정에서 상임위원장 확보를 놓고 원내지도부를 흔든 3선 이상의 일부 협상파들에 대한 경고도 의미도 담겼다. 3선 의원들이 “상임위원장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일부 의원들은 주 원내대표에게 특정 상임위원장 확보를 당부해 협상의 집중력을 약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귀전·이창훈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