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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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비극의 문을 연 13자리 ‘개인정보 만능키’ 주민번호 [S 스토리]

주민번호 변경제 3년, 무슨 일이… / 주민번호로 주소·신용정보까지 접근 / n번방 운영진 주민번호 노출로 협박 / 신상 털린 피해자 두려워 지시 따라 / 데이트·가정폭력·보이스피싱 등 노출 / ‘털렸다’ 하면 재산·신체·심리적 피해 / 3년간 변경 신청 중 72%만 인용돼
주민등록번호(주민번호) 변경이 가능해진 것은 불과 3년 전인 2017년 6월부터다. 그 전까지는 행정당국의 오류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정정’을 허용했다. 특정 지역번호를 부여받아 차별과 위협에 시달린다는 탈북민에게만 주민번호 뒷자리 변경을 허용했던 정부 방침이 바뀐 것은 2014년 1월 신용카드 3사의 1억건이 넘는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때문이다. 관계 기관의 허술한 개인정보 관리 및 주민번호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와중에 헌법재판소는 2015년 12월 ‘주민번호 변경 불허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정부는 ‘주민번호 유출에 따른 생명·신체, 재산 등 2차 피해 예방’을 이유로 2017년 5월30일 주민번호 변경제를 시행했다.

 

◆주민번호로 주소지 알아내 해코지하기도

 

그런데 주민번호 유출이 단순한 불안감 외에 실질적으로 생명이나 재산에 심각한 수준의 위협을 가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은 “실제로 겪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 피해자들이 대표적 예다. 조주빈 등 대화방 운영진은 이들을 성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여권이나 주민등록증,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같은 신상정보를 담은 사진을 올리도록 했다.

 

신고하면 찾아가 해코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한 피해자는 주민번호 변경 신청서에서 “가해자들이 나를 찾아오거나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봐 하루하루가 두렵다”고 했다. 주민등록번호변경위원회(변경위)는 n번방 피해자 18명이 주민등록번호를 바꿨다며 다들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보복과 왕따 등 2차 피해를 두려워했다고 19일 밝혔다.

 

실제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가 주민번호 유출 후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40대 여성 A씨의 전 남편은 만취해 집을 찾아와 다섯살 아들 목을 붙잡아 흔들고 A씨를 폭행한 혐의로 6개월 동안 수감됐다. A씨는 “전 남편이 지난 2월 출소했는데 또 우리들 사는 곳을 수소문하고 있다”며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했다.

 

20대 B씨는 주민번호 변경 신청서에서 “남자친구가 나를 성폭행해 감옥에 갔다”며 “성폭행 후 내 주민등록증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3년 뒤 보복하려고 찾아올까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주민번호, 모든 개인정보 알아내는 만능키”

 

주민번호 유출에 따른 재산피해는 더 심각하다. 변경위에 따르면 2017년 6월1일부터 이달 5일까지 변경 신청 접수된 2445건의 70%(1706건)는 보이스피싱(32.3%)이나 신분도용(21.0%), 스미싱·해킹(16.4%) 같은 재산상의 피해였다. 이정민 심사지원과장은 “주민번호는 거의 모든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만능키”라며 “주민번호만 알면 이와 연계된 주소지와 연락처, 가족관계, 계좌번호, 신용정보 등 웬만한 신상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의 한 치과의사는 최근 자신의 계좌에서 1억5000만원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보이스피싱 등에 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투자를 위해 수개월 전 가상화폐거래소에 회원가입한 게 화근이었다. 한 해커가 거래소 회원가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들고 찍은 그의 인증샷을 통해 계좌번호, 비밀번호 등을 알아낸 것이다.

 

특히 보이스피싱 범죄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진화했다. 요즘 보이스피싱범들은 전화통화로만 접근하지 않는다. 주민번호를 통해 파악한 다양한 신상정보로 전화·메신저 수신인을 홀린 뒤 순식간에 돈을 빼간다. 지난 4월 주민번호 변경을 신청한 C씨는 긴급재난지원금을 담보로 1200만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사기범 말에 속아 대출을 받은 뒤 무심코 “전산 확인용”이라는 URL주소를 눌렀다가 대출금을 모두 빼앗겼다.

◆유출에 따른 상당한 피해 입증돼야 번호 변경

 

하지만 모든 주민번호 변경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3년간 변경위 심사가 이뤄진 2088건 중 인용률은 72.0%(1503건)에 그친다. 주민번호를 바꾸려면 △주민번호 유출 사실 △유출과 재산·생명·신체 피해(우려)의 상관성 △관련 입증자료가 있어야 한다. 변경위의 한 조사관은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관련 주민번호 변경 신청건에 대해서는 피해자 입장을 감안해 늦어도 3주 이내에 변경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주민번호 유출과의 인과관계나 피해사실 입증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신청인들 사연이 하나같이 어둡고 심각하다 보니 변경위 조사관들도 우울감에 시달린다. 이 과장은 “성폭력과 보이스피싱 피해 여성의 주민번호 변경 신청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며 “변경위에 ‘각하’ 의견을 달아 보고서를 올리는데 공교롭게도 접수번호가 ‘444’였더라”고 씁쓸해 했다.

 

간혹 ‘웃픈’ 사연도 접수된다. 변경위 관계자는 “특정 지역의 주민번호에는 ‘4444’가 들어가는데 ‘재수 없다’고 주민번호를 바꿔 달라는 민원이 있었다”고 전했다. 주민번호 뒷자리 여섯자리가 모두 동일 숫자여서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었다는 의사도 변경위의 쓴웃음을 자아냈다.

이 과장은 변경위 업무가 고되고 스트레스도 심하지만 ‘주민번호를 바꿔 새 생명을 얻은 것 같다’는 감사인사를 받을 때마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공무원으로서 일의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보이스피싱 등 다양한 피해사례를 접하다 보니 웬만한 사기에는 속지 않는다”고 농담한 뒤 “주민번호 변경제는 개인정보가 유출됐을 때 불안감을 해소하고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좋은 제도이니 피해 발생 시 많은 이용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