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 거쳐 서울시장 첫 3연임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박원순 누구인가 / 文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 / 시민단체 ‘참여연대’ 결성 주도 / 재벌개혁·부패정치 척결 운동 / 서울시장 보선으로 정계 진출 / 9년간 서울시정 평가는 갈려 / 생활밀착형 정책엔 높은 점수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루어 줄 것임을 믿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02년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에서 지인들에게 남긴 가상 유언장 중 한 대목이다. 박 시장은 인권변호사로, 시민사회 운동가로, 사상 첫 3선 서울시장으로 활동하며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숨가쁘게 뛰어왔다.

 

1956년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난 박 시장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1학년 재학 중 유신체제 반대 집회에 나섰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고 조영래 변호사 등이 사법연수원(12기) 동기다.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지만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조영래 변호사 등과 1985년 경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시작으로 ‘말지(紙)보도지침 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시국·인권 사건 변론에 참여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90년대 들어선 시민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1994년 진보성향 시민단체의 대표 격인 참여연대 결성을 주도해 2002년까지 사무처장과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참여연대는 이후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 운동,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 운동 등을 주도했다. 2000년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을, 2002년 중고 생활용품 공유 개념의 ‘아름다운 가게’를, 2006년 공공행정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인권 변호사와 시민운동가를 거쳐 최초 3선 서울시장에 오르며 대권까지 노리던 박원순 서울시장의 꿈은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사법연수원 동기인 문재인 대통령과 1982년 연수원 수료식에서 기념촬영한 모습. 연합뉴스
1998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당시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행동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고인이 정계에 뛰어든 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중도 사퇴로 치러진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다. 선거 전 지지율은 낮았지만 당시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었다. 이어 2014년과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내리 승리하면서 첫 3선 서울시장에 등극했다.

 

박 시장이 9년간 이끌어 온 서울 시정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 복원이나 오세훈 전 시장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건립처럼 눈에 띄는 정책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따릉이’와 반값 등록금 등 청년·취약계층 지원, 도시재생 사업 등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내 삶을 바꾸는” 생활밀착형 정책들에 높은 점수를 주는 시민들도 상당하다.

2011년 8월 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 대학원장과 포옹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최초로 3선 서울시장에 당선된 날 축하 꽃다발을 들고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박 시장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서울형 재난긴급생활비 지급을 주도하고 4·15 총선 후 더불어민주당 내 우군들과 접촉면을 늘려가며 대권 준비를 이어갔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안 되고 싶어도 하게 되는 운명적인 직책”을 향한 박 시장의 마지막 도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 사건으로 급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됐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