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과 의붓아들(현 남편의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고유정(37)씨가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고씨에게 전 남편 살인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로 인정했고, 의붓아들 살해 혐의에 관해선 무죄로 판단했다. 검찰이 혐의를 입증할 만한 ‘스모킹 건’을 결국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고등법원 제주제1형사부(왕정옥 부장판사)는 15일 전 남편 살인 및 사체손괴·은닉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고씨 사건 항소심에서 “중대한 생명 침해, 잔인한 범행방법, 피해자 유족의 고통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범행에 제공된 물건을 몰수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1심과 같이 의붓아들 홍모(당시 5세)군 살해 혐의에 관해선 무죄를 인정했다.
왕 부장판사는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간접증거만으로도 (혐의) 인정은 가능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허용돼서는 안 된다”라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어 원심과 같은 무죄로 판단하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다”라고 말했다.
고씨는 지난해 3월2일 오전 4∼6시쯤 충북 청주 자택에서 친부(고씨의 현 남편)와 잠을 자고 있던 의붓아들 홍군을 뒤에서 강하게 눌러 살해한 혐의로 추가 기소된 바 있다.
이 사건은 제주에서 조모와 살고 있던 홍군이 고씨의 제안으로 지난해 2월28일 청주 자택으로 돌아온 지 단 3일 만에 발생했다. 당시 청주 상당경찰서는 아이의 사인이 ‘질식사’라는 전문의 소견 하에 같은 해 6월3일 친부이자 고씨의 현 남편인 홍모(38)씨를 살인 혐의로 입건했다.
그런데 5월25일 고씨가 제주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후 경찰은 홍씨를 ‘살인’에서 ‘과실치사’로 혐의를 바꿔 수사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홍씨는 경찰의 초동수사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해 6월13일 고씨를 아들 살인 혐의로 제주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이후 상당경찰서는 홍군 사망 후 7개월이 지난 9월30일이 돼서야 고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아울러 홍군의 친부인 홍씨의 과실치사 혐의는 ‘증거없음’으로 수사 종결했다.
법의학자(전문가)들은 홍군의 사인에 대해 ‘누군가의 외력에 의한 압착성 질식사’라는 소견을 내놓았다.
◆검찰이 제시한 안방 PC 접속 디지털 증거 뒤집혀… 재판부 “증명력 번복돼, 피고인 깨어 집안 돌아다녔단 사실 인정 어려워”
검찰은 범행 추정 시간(새벽)에 고씨가 자지 않고 깨어있었다는 증거로 ‘안방의 컴퓨터 사용 내역’을 내세웠다.
고씨는 사건 당일 자신은 다른 방에서 잠을 잤고, 문 밖으로 나간 적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검찰은 범행 추정시간 직전인 3월2일 오전 2시35분부터 36분까지 약 1분간 고씨가 안방에 있던 데스크톱 PC를 사용해 ‘제주~완도 배편 블로그’에 접속한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깨어있었던 고씨가 현 남편인 홍씨와 의붓아들 홍군이 잠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와 홍군을 살해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검찰이 제시한 이 ‘디지털 증거’는 어이없게도 제주경찰의 추가 조사로 뒤집혔다. 당초 청주 상당경찰서가 진행한 디지털포렌식 결과와 실제 안방 PC 사용 날짜·시간에는 두 달 넘게 차이가 있었다는 것.
제주 경찰이 추가 분석한 결과, 검찰이 주장한 PC 사용시간‘3월2일 오전 2시35분’은 고씨가 실제 접속한 시간이 아닌, 해당 블로그 운영자가 글을 작성한 시간이었다. 고씨가 해당 블로그를 검색한 건 한참 뒤인 5월16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건당일 오전 2시35분부터 36분까지 안방 컴퓨터로 인터넷을 검색했다는 주장은 디지털 기록 분석에 문제가 있어 증명력이 번복됐다”라며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피고인이 깨어 집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법의학 소견도 인정 못한다는 재판부… “통상적 부부관계, 살해동기 부족”
또한 재판부는 “사망 전 피해자(홍군)가 체격이 왜소하고 친부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점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낮지만, 홍군이 친부의 다리 등에 눌려 질식사하는 ‘포압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무죄 판단 이유를 밝혔다.
이어 법의학자 등 전문가 소견에 관해 “부검 결과를 토대로 사후적으로 추론한 것”이라며 “그러한 의견을 (혐의를) 완전히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홍군)가 어린 나이고 시신 상태에 따라 점출혈 발생과 사체 강직의 정도가 상이할 수 있다”라며 “피해자가 당시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 상태여서 약물 부작용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고씨가 전날 밤 수면제 성분이 든 차를 마시게 했다’는 현 남편 홍씨 측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증거가 부족하고 고씨가 경험칙상 발각될 위험이 높은 범행방법을 택했는지도 의문이 든다”라고 했다.
또한 “피고인과 남편이 주고받은 문자를 보면 적개심 있는 내용도 있으나 화해한 이후에는 다시 다정한 문자를 보내는 등 통상적인 부부관계를 보였고, 남편과의 관계유지를 위해서는 임신하거나 피해자를 양육해야 한다는 것도 인지했던 점을 감안할 때 살해 동기가 부족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결국, 검사가 제출한 간접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이 부분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기에 충분할 만큼 압도적으로 우월한 증명이 있다고 볼 수 없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왕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1심과 같은 판단이 나오자 방청석에서는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현 남편인 홍씨는 판결 내용을 듣는 도중 법정을 빠져나가 버렸다.
한편, 재판부는 이날 고씨의 전 남편 강모(당시 36세)씨 살해 혐의에 관해 ‘계획범행’을 인정하고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피고인(고유정)은 (범행 후) 경찰 신고가 아닌 ‘마트 환불’과 같은 이례적인 행동을 했고, 피해자를 가장해 허위 문자를 보냈던 정황 증거 등을 종합하면 성폭행에 대항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고씨는 지난해 5월25일 오후 8시10분부터 9시50분 사이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27일까지 해당 펜션에 머물머 사체를 훼손한 혐의를 받는다. 이후 그는 완도행 여객선, 가족 명의의 김포 아파트 인근 등지에서 훼손한 강씨의 시신을 여러 차례 나눠 버렸다. 아직까지 강씨의 시신은 발견되지 못한 상태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