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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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강한 신진작가들, 사회 고정관념을 꼬집다

부산시립미술관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0’
권하형·노수인·문지영·유민혜 등 6명
회화·설치·영상 작품 등 30여점 선보여
사전예약제 운영… 10월4일까지 전시
문지영 설치작품 ‘100개의 마음’과 그 뒤로 회화 ‘엄마의 신전Ⅴ’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부산. 두 세력의 경합지 한반도에서 부산은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곳일지 모른다. 근대미술 유입 통로였고, 피란예술가와 토착예술가들의 문화 용광로였으며, 지금까지도 자기만의 생태계에서 숨쉬며 발전해 가는 중이다. 그렇게 부산은 한국미술사를 한층 두텁게 만들고 있다.

1999년부터 올해까지 총 16차례, 21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신진작가전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전이 지난 17일 시작됐다.

이번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0 : 낯선 곳에 선’ 전시회는 단순히 부산 출신 작가만이 아닌, 물리적 공간적으로 또는, 활동 속에서 다양한 연결고리로 부산을 근간으로 활동하는 차세대 작가 6명을 선정했다. 권하형, 노수인, 문지영, 유민혜, 하민지, 한솔이 회화와 설치, 영상 등 총 30여점을 내놓았다. 마침 같은 공간에서 1960∼70년대 부산미술사를 돌아보는 전시가 진행 중인 것과 대비돼 부산미술의 과거와 미래를 한걸음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안긴다.

문지영 ‘엄마의 신전Ⅵ’

문지영의 공간엔 초기 연작 ‘가장 보통의 존재’ 중 한 구작과 ‘엄마의 신전’ 연작의 신작들이 어우러졌다. 그는 발달장애를 가진 여동생과 투병생활을 했던 엄마 등 여성과 가족, 약자의 교집합에 속한 인물을 줄기차게 그리며 ‘보통’이라는 사회적 기준을 반문해온 작가다.

새 연작 ‘엄마의 신전’은 가족을 위해, 실은 가족을 대리해 소망해야 했으며, 동원할 방법이라곤 기도밖에 없던 여성, 엄마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가족의 욕망, 바람을 기도하는 대리자가 돼야 했던 엄마들을 조명하기 위해, 캔버스 주인공들을 모든 엄마들, 혈연관계 내 여성들로 확대한 듯 보인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이 시대 여성들이 비참한 가슴속에 품고 있는 그 말을 대신 해주려 나타난 사람처럼, 문지영은 끈질기고 성실하며, 진실하게 사회가 응축된 최소단위로서의 가족, 그 안의 여성을 그리고 있다.

기존에 선보여온 특유의 묵직한 덩어리감과 부드러운 색채가 유지되는 가운데, 곳곳에서 흘러내리는 물감을 방치한 흔적이 늘었다. 마치 녹아내리는 마음이나 눈물처럼 느껴져서 작가의 주제의식을 한층 더 강하게 표현하는 장치로 다가온다.

권하형 ‘벗어난 지도1’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온 권하형의 새로운 작품들, ‘벗어난 지도’는 작가가 그간 숨겨 놓았던 비밀 앨범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밀양이나 팽목항 등 역사와 사건 현장의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과는 달리,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풍경과 사물을 보며 셔터를 눌렀다. 금이 간 옛집과 그 벽 틈에 박힌 쓰레기, 아무렇게나 자란 풀밭 속에 숨어 있는 곤충들, 빛바래 미색이 된 벽지에 구식 부채가 붙어 있는 풍경 등이다. 개발로 인해 사라진 건물, 풍경 등을 그리워하며 작가 자신의 정서와 감성의 촉수에 더 집중한 결과물들이다.

돌아온 고향에서 옛길을 따라가는 자신의 행로에, 신형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소리를 낸 것에서 착안해 GPS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을 찾아내며 사진을 찍었고 ‘벗어난 지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유민혜 ‘거산실수’

유민혜의 설치작품 ‘거산실수’는 어느 낙원의 숲속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거실과 산수를 결합해 만든 작품명이 일러주듯 어느 1980∼90년대 단독주택 거실에 있을 법한 원목가구들을 전시공간에 배치해 산과 계곡, 구름 등을 표현했다.

커다란 문짝들로 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얇은 관을 비스듬히 세워 산자락 모양을 표현했다. 그 앞으론 인테리어용 작은 분수를 놓아 졸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들고, 그 뒤론 둥글둥글하게 표현된 장식적인 침대헤드를 세워 구름이라 정했다.

전시장이 마룻바닥 형태인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전시장을 통째로 거실로 만들었다고 한다. 유민혜는 공간을 관람하는 것이 아닌, “이 거실을 산책해 달라”고 했다. 그의 주문대로 산책하듯 걸어보니 마침 삐그덕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에 숲속에서 나뭇가지를 밟는 나를 상상하게 되고, 전시장 벽면에 걸려 있는 침대헤드가 구름이 돼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도 그려진다.

노수인 ‘소리도미노’

사물의 배치만으로도 감각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준다. 전시공간에서 이색경험을 하고 나면, 요술을 부리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읽힌다.

그 외에도 근엄한 캔버스에 바퀴벌레 찾기를 제안하는가 하면, 거대한 30센티미터 자를 설치해 사회 기준을 되묻는 노수인의 도량형 놀이도 흥미롭다.

하민지는 동물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분간이 불가능해진 내장과 기계가 얽힌 형상을 10개 캔버스에 이어지도록 그려내, 그가 그동안 문제시해온 살처분 시스템을 초대형 작품으로 선보인다. 한솔은 게임과 VR(가상현실)를 이용해 공모전이라는 경쟁의 장에서 끝없이 달려야 하는 자신과 예술의 처지를 이야기한다.

이 개성 강한 6개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각 전시공간 입구에 걸려 있는 커다란 장막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사진을 담은 초록빛 반투명의 장막은 신진 작가들을 새 물결에 비유하는 의미에서 제작됐다. 관람객이 파도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각 공간으로 흘러들고 나도록, 파도를 태우는 느낌이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3층 대전시실에서 계속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부산=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