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폐쇄 통보를 하자 휴스턴 주재 중국총영사관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소방차가 출동했으나 문서를 소각하는 것이라 소방관 진입은 거부됐다. 문서는 정보의 보고다. 1975년 남베트남 사이공, 1979년 이란 테헤란에서 미국 외교관들이 철수할 때 가장 서두른 것은 공문 파기였다.
75년 전 8월 일본 열도 곳곳에서도 불길과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태평양전쟁 패전과 함께 육·해군성, 외무성, 대장성(현 재무성) 등 모든 조직이 점령군 진주 시 문제가 될 문서 소각에 혈안이 됐다. 당시 내무성 관료 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전 법무상(다함께야스쿠니신사를참배하는국회의원모임 초대회장)은 전범이 될 만한 문서는 모두 태워버렸다는 증언을 남겼다. 문서 파기가 정보 보안을 넘어 진실 은폐 과정임을 보여준다.
일본 패전 당시 문서 소각은 2014년 4월 시작한 한·일 일본군위안부문제 국장급 협의에서도 화제가 됐다. 일본 측은 위안부 동원·운용의 강제성을 입증할 공문서가 없음을 강변했다. 우리 측은 패전 당시 도쿄 하늘에 솟아올랐던 불길과 검은 연기를 언급하며 파기 가능성을 내비쳤고 듣고 있던 일본 측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사실 일본은 기록 대국이고, 일본인은 기록 장인이다. 개인이 장부나 일기, 메모로 적어 놓은 세밀한 상황이나 수치, 감정이 훗날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한 이유 중 하나로 일본군 병사의 일기가 거론될 정도다. 미군이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면 일기를 모두 수거한 뒤 분석해 작전, 보급, 심리 상태를 손금 보듯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미국의 승인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일본의 관청가 가스미가세키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길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몰린 각종 스캔들에서 일본인, 특히 공직자가 목숨처럼 여기는 기록의 은폐와 조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국가 예산으로 아베 총리의 개인 후원회 행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는 벚꽃을 보는 모임. 어떤 인사가 왔는지 보여주는 참석자 명부는 행사의 성격을 규명할 스모킹건이나 내각관방 등은 해당 문서의 보전 기간이 1년 이내라 파기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한다. 마이니치신문 특별취재반의 추적취재기 ‘공문서 위기’(2020년 6월 출간)에 따르면 매년 개최되는 이 행사는 전년의 예를 참고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참석자 명부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는 관료들의 증언이 잇따른다.
모리토모학원 스캔들의 공문서 개찬(改竄) 문제도 마찬가지. 개찬은 악용 목적으로 문서 자구를 고칠 때 쓰는 말이다. 2017년 2월 아베 총리 아내 아키에가 명예 초등학교장인 사학에 8억엔이나 싼 헐값에 국유지가 매각된 사실이 보도됐다. 1년 후인 2018년 3월엔 재무성 이재국이 관련 문서에서 아키에 언급 내용 등 300여곳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파문이 다시 커졌으나 검찰이 관계자 전원을 불기소하면서 유야무야됐다.
최근 두 가지 일을 계기로 이 사건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첫 번째는 공문서 개찬 사실이 발각됐을 때 국회에서 아베 총리와의 무관함을 주장한 재무성 주계(主計·회계)국장과 이재국장이 각각 재무성 관료 넘버 1, 2인 사무차관과 주계국장으로 영전했다. 비난받아 마땅한 보은인사임을 부정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상사 지시로 공문서 개찬에 참여했다가 2018년 3월 자살한 재무성(긴키재무국) 직원의 아내가 국가와 상사를 상대로 제기한 1억1000만엔 손해배상청구소송이 15일 첫 재판을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의 자살 경위를 규명해달라”고 절규한다. 소송의 무기는 상사가 지시했다는 사실을 적은 남편의 수기, 각종 노트와 메모, 아내 본인의 일기라는 또 다른 문서다.
공문서 조작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흔드는 범죄이자 진실을 호도하는 행위다. 기록 대국 일본에서 파렴치한 권력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 사건의 결말이 주목된다.
김청중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