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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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금기를 향한 도전…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39) 헤르난 바스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종교·신화 등 다양한 분야서 모티브… 전경·배경 압축해 공간 인식 왜곡시켜
작품들 남다른 전개·표현 방식 주목… 전통적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 보여줘
바스의 대표작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 강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
성장기 소년 등장 과도기적 불안 표현… 변화·불안 속 감성의 아름다움 담아내
앙리 마티스의 ‘강가의 목욕하는 사람들(Bathers by a River)’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하지만 여성의 누드 대신 소년들의 여름을 그렸다.‘강가의 목욕하는 네 사람 four bathers by a river’(2017) PKM갤러리

◆불안한 여름

이렇게 불안한 여름이 또 있었을까? 여름은 항상 여행을 떠나는 계절이었다. 무더운 날씨를 피해 바다로 또는 산으로 몸을 향했다.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면 자유를 만끽하며 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유를 즐기며 마음의 안식과 안정을 찾았다. 여름에는 모든 것의 외면이 햇살 아래서 빛이 났다. 그리고 그것의 내면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벌써 7월의 마지막 주이고 여름의 절반 이상이 지났다. 그런데도 신나는 일은 없고 시시함만이 주위에 가득하다. 여행계획을 세울까 했다가도 금세 고개를 젓는다.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관광지 방문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국내 여행객 수요가 늘며 높아진 숙박업소 가격도 한몫한다.

마음의 쉼을 찾는 기회가 어려운 계절 뉴스도 소란스럽게 이어진다. 싸움과 사고, 억울한 일과 잔인한 일이 요즘 유독 많은 것 같다. 나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편한 날이 하루도 없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비단 나만 갖는 것이 아닌 듯싶다. 전에 없이 불안함으로 가득 찬 여름을 보내며 생각나는 것은 헤르난 바스(Hernan Bas, 1978)의 작품이다.

◆헤르난 바스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

헤르난 바스는 마이애미 출신의 쿠바계 미국인 작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흥미를 느껴 고향의 뉴 월드 스쿨 오브 아트를 졸업했다. 뉴욕 쿠퍼 유니온에 입학했지만, 개인 작업을 위해 그만두었다.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할 기회들이 생겼다. 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컬렉터 루벨 가족의 눈에 들어 이름을 알렸다. 30대 초반에 휘트니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 유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젊은 나이에 미술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남다른 이야기 전개와 표현 방식이 있다. 전통 매체인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바스는 초기에 일러스트와 드로잉 등의 작업을 했다. 형태와 장면을 포착했고 화면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작업을 계속할수록 그 안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늘어났다. ‘아 이건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일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작품에 반영했다. 보는 이가 상상력을 사용해 화면을 오래 보게 만드는 시도가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헤르난 바스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작업의 모티프를 다양한 분야에서 찾는다. 예술, 시, 종교, 신화, 영화, 문학 등 그 범위가 넓다. 특히 19세기 중후반의 유럽 문필가들에게 관심이 많다. 오스카 와일드,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등 탐미주의와 데카당스 경향을 띤 작가들이다.

캔버스는 캔버스 틀이 정한 한정된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이 한정된 면적 속에서 무한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전경과 배경을 압축해 기존 화면의 공간 인식을 왜곡시킨다. 이렇게 연결한 화면구성을 통해 이야기 역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바스가 바라듯이 보는 이의 상상의 세계도 멈추지 않고 확장한다.

바스는 2012년 전시에서는 바스는 SF TV 드라마 ‘엑스파일’과 보들레르의 시, 밀턴의 ‘실낙원’ 등을 한 번에 언급했다. 2015년의 전시에서는 피에르 보나르가 일상의 인물을 그린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6년의 전시에서는 1920년대 영국 상류사회를 기록한 포토그래퍼 세실 비튼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고 작업한 연작을 전시했다. 올해 열린 가장 최근의 전시에서는 역사적 사건과 뉴스 등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다.

‘강가의 목욕하는 두 사람 two bathers by a river’(2017) PKM갤러리

◆유약한 강가의 소년들

앞서 떠올린 헤르난 바스의 작품들은 ‘목욕하는 사람들’ 연작이다. 2017년, 국내의 한 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의 안에는 울창한 수풀과 신비로운 강이 묘하게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그 사이에서 등장한 소년들은 여름날의 무더위에서 벗어나고자 강에 두 발을 담그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림의 구도는 실타래 사이로 이들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윗옷을 전부 벗거나 반쯤 걸쳐 놓은 소년들의 몸은 유약하고 깨질 것만 같다. 기운 없는 얼굴에서는 나른함과 우울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작품들은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의 ‘강가의 목욕하는 사람들(Bathers by a River)’(1916)을 보고 그렸다. 대상을 2차원의 면으로 분석하는 시도를 하는 그에게 사람 몸의 형태는 다양한 해석과 시도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바스는 마티스의 이 작품을 보고 색과 구도는 단순하지만 이야기가 섬세하고 풍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화면에서도 담아내고 싶었다.

바스는 이 작품들을 통해 파격적인 시도를 전개한다. 강가에서 목욕하는 인물의 누드는 오랜 시간 그려진 미술의 고전적 장면이다. 하지만 남성이 목욕하는 모습은 금기처럼 여겨진 시간이 있었다. 동성애를 부정하던 시절 그것에 관한 표현으로 읽혔기 때문에 꺼려졌기 때문이다. 바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이러한 금기의 역사를 과감하게 깨고자 시도했다.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화면 속 장면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기서 여성의 풍만한 몸은 소년의 깡마르고 왜소한 몸으로 대체된다. 예민하고 감성적인 소년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난 몸이다. 하지만 소년은 나체이기보다 여름날 쉽게 볼 수 있는 반라의 상태다. 강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 나누는 두 명의 소년도, 물놀이를 하는 듯한 네 명의 소년도 평범해 보인다. 덕분에 거부감 없이 그림에 다가가고 매력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성장기의 소년을 그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년을 통해서 과도기적 존재의 불확실한 정체성이 가져오는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는 평생을 과도기적 존재로 산다. 나이를 먹어도 불안을 대하는 태도는 발전하기가 어렵다. 소년의 모습에서는 싱그러운 여름날의 이미지와 함께 인간의 성장통이 전해진다. 변화와 불안이 공존하는 인간의 여린 감성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바스의 인물들은 우울하거나 나른한 것 같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목욕하는 두 사람, two bathers (paper mask)’(2017) PKM갤러리

◆불안에 맞서야 할 때

바스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 중에는 ‘다윗과 골리얏-드 쿠닝의 스튜디오, 뉴욕 이스트 햄튼(David & Goliath-de Kooning’s studio, East Hampton NY)’(2012)이 있다. 작가가 동경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윌렘 드 쿠닝에 대한 오마주가 담겼다. 그에 대한 찬미와 동시에 미묘한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에는 드 쿠닝의 작업실 앞에 한 소년이 서 있다. 그 소년은 자기 몸보다 수백배 크게 보이는 건물을 향해 돌을 던진다. 여전히 여리지만, 소년은 이제 무엇인가에 맞서기 시작했다.

처음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모두 여름이 오면 괜찮아질 거라 말했다. 기온이 올라가면 바이러스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예측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제 여름은 끝을 향해 가는데 사망자는 끊이지 않고 나온다. 인간이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래도 다윗과 같은 소년을 생각하며 불안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항상 자구책을 찾아 지금까지 왔으니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다.

김한들 큐레이터 / 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