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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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전세의 위기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는 아들이 한국 대학에 진학하자 지난해 서울 광화문의 한 아파트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당시 졸리는 월세 없이 보증금만으로 집을 빌릴 수 있는 한국의 전세 제도에 놀라며 신기해 했다는 후문이다. 전세 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임대차 계약 방식이다. 남미 볼리비아에 안티크레티코(anticretico)라는 유사한 제도가 있지만, 그 비율이 전체 임차의 3%에 불과한 데다 세입자도 등록세와 부가가치세를 납부한다는 점 등이 우리의 전세 제도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전세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따른 개항 이후에 태동했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부산·인천·원산에 조성된 일본인 거류지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며 주택 부족 현상이 빚어져 이 제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 여파로 서울에도 전셋집이 등장했다. 당시 전셋값은 주택 매매가의 70~80%였다. 이후 19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농촌 인구가 도시로 대거 몰리면서 전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세 제도는 집값 상승세와 고금리를 배경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정착됐다. 임대인은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장만하면 집값 상승이나 이자 수익을 통해 자산을 늘렸고, 세입자는 주택 매매가보다 적은 비용으로 일정기간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전세 비중이 줄고 월세나 반(半)전세가 늘고 있다. 고금리 시절엔 보증금을 은행 예금에 넣어도 쏠쏠한 수익을 냈지만, 초저금리 시대에는 전세 보증금으로 이자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2005년에는 임차 중 전세 비율이 54.1%였지만, 지난해에는 39.7%에 그쳤다.

최근 정부는 실거주 외 주택의 세 부담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 때문에 전세 매물의 다수를 차지했던 ‘갭투자’(전세 낀 부동산 투자)가 사실상 막혔다. 어제부터 전세 거주를 4년(2+2년)간 보장하고 임대료 인상률을 5% 이내로 묶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시행돼 임대인의 전세 시장 참여 유인이 대폭 줄었다. 전세 제도의 입지가 갈수록 축소돼 머지않아 아예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박창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