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에게도 배신감…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해”
피해 기억으로부터 회복하고, 일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가 고통받는 이상한 결말을 바로잡고 싶었다. 종교재단 법인에 근무하며 이사장으로부터 성추행 및 성희롱을 당하고 성적 요구를 받은 사실을 알린 미투 참여자 한모씨의 바람은 그뿐이었다.
수년에 걸친 지난한 법정 다툼 끝에 가해자는 대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법정을 나서는 순간 끝이 났다. 성폭력 유죄가 확정됐지만 재단 이사회는 이사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며칠 뒤 열린 이사회에서 오히려 이사장 임기 보장을 결정했다.
한씨는 “대법원 확정판결만 나면 가해자가 당연히 해임될 거라고 생각했다”며 “당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회사로 돌아가면 다시 가해자와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해자가 계속 이사장으로 있으니 출근하면 자꾸 마주친다. 볼 때마다 성폭력 피해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괴롭다”고 토로했다.
살아 있는 권력은 한씨가 원래 업무로 복귀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기존에 하던 일과 전혀 상관없는 부서에 배치해 화장실 청소나 풀 뽑기 등 잡무만 시켰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는 한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사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회식이나 회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물론 내선전화도 뺏겼다. 고용노동부를 통해 부당함을 호소한 뒤에야 놔 준 전화기에는 내선이 아닌 낯선 번호가 연결돼 있었다. 걸려오는 전화마다 ‘OO반점’이냐며 한씨가 아닌 애먼 식당을 찾았다. 한씨는 “의도적으로 사내 네트워크에서 소외시켜 고립감과 모멸감을 줘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업무상 괴롭힘과 따돌림뿐 아니라 사생활까지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윗선의 지시를 받은 직장 동료들은 감시자가 됐다. 성폭력 사실을 고발한 직후 직장 동료들은 한씨의 자취방까지 찾아와 집주인을 만나고 한씨의 거취를 물었다. 위협을 느낀 한씨는 신변보호요청을 하고 수년간 보호소에서 지냈다. 주변인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봐 가족, 친구와의 연락마저 끊었다.
직장에서 피해자인 한씨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씨는 “이사장이 이전에도 성폭력 전력이 있음을 여러 사람이 아는데 다들 가만히 있으니 배신감이 컸다”고 말했다. 단 한 사람, 오래전 한씨처럼 이사장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또 다른 피해자만이 한씨의 상황을 이해했다. 먼저 연락해와 한씨를 만난 그가 건넨 첫 마디는 “미안하다”였다. 당시에 신고할 용기가 없어 그냥 넘어갔는데 그래서 한씨가 피해를 입은 것이란 자책이었다. 한씨는 “그분이 나한테 미안할 일이냐”며 “가해자에게 들어야 할 사과를 왜 또 다른 피해자한테 듣고 있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포기하면 언젠가 나도 그분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사과하게 됐을 것”이라며 “오히려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가해자는 한씨를 대상으로 각종 역고소도 제기했다. 명예훼손, 모욕,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 피해사실을 밝히는 과정에 문제를 제기해 한씨의 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한씨는 “후에 알고 보니 가해자가 피해자를 압박하기 위해 제기하는 역고소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고 말했다.
변호를 맡았던 국선변호인마저 한씨에게 충격을 줬다. 변호인은 한씨에게 “어차피 회사로 돌아가는 게 목적 아니냐. (가해자가 만진) 신체부위별로 합의금 받고 정리하라”고 말했다. 한씨가 바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피해자들이 호소하듯, 그 역시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합당한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한씨는 사내 성폭력 처리가 미비할 때 법인 대표를 처벌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직장 내 성폭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경우 사업주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는데, ‘사업주’의 범위에 법인 대표는 포함되지 않는 맹점이 있다. 한씨의 경우처럼 이사장이 가해 당사자라면 가벼운 ‘셀프징계’로 끝내버려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한씨는 “근로기준법에서 ‘사용자’란 단어를 광범위하게 쓰고 있는 데 비해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사업주를 너무 좁게 해석한다”며 “이런 법적 허점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재판부가 그를 용서했다”
“판결문에서 감형 요인으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해 퇴사한 점을 고려했다’고 적시한 대목을 듣고 귀를 의심했습니다.”
대기업 임원의 비서로 근무하던 중 상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고 사내 미투를 한 김모씨는 폭로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사법부를 향한 불신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과 한마디 없이 자신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자 회사를 나가버린 사람을 두고 ‘피해자를 위한 퇴사’로 해석하더라. 재판부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가해자를 옹호하는 이유가 궁금했다”며 “피해자인 제가 가해자를 용서한 적 없는데 법이 알아서 용서해 주니 모든 믿음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CCTV 등을 통해 강제추행 사실이 명확히 입증됐음에도 긴 시간 이어진 법정공방 끝에 가해자가 받은 처분은 벌금형. 판결문에 적시된 감형 요인들은 비수가 되어 김씨의 가슴에 꽂혔다. 합의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밝히고 엄벌탄원서를 여러 번 냈지만,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유를 들어 감형이 됐다는 설명이다. 김씨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유명인 미투에서조차 엄벌이 내려지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일반인 미투는 오죽하겠나”라며 “법은 피해자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내에 떠도는 거짓된 말들도 김씨의 삶을 무너뜨렸다. 김씨는 사내 고발 과정에서도, 수사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가해자 처벌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못박았지만 회사에는 온갖 거짓 소문이 나돌았다. 가해자의 측근은 물론 함께 일하던 동료들까지 억측과 소문을 만드는 주체가 됐다. 김씨는 “제 부모님보다도 나이가 많은 가해자와 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거나 ‘뭔가 바라는 게 있어 미투했다더라’, ‘그 여자가 원래 옷을 좀 그렇게 입고 다녔다더라’ 같은 뒷말이 돌았다. 대놓고 ‘네가 우리 회사의 평판을 망쳤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2차 피해의 고통을 털어놨다.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계속된 자기 검열도 김씨를 괴롭혔다. 김씨는 “혹여나 피해자답게 보이지 않아서 피해 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을까 늘 ‘내가 피해자처럼 보이는가’를 스스로 물었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피해자다움’의 프레임에 갇힌 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반면 가해자는 당당했다. 가해자는 퇴사 후에도 회사의 다른 임원들과 골프를 치러 다니는 등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사내에서 여전한 가해자의 위력은 현재 휴직 상태로 복직을 기다리는 김씨에겐 실체를 가진 위협이다. 김씨는 길에서 가해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을 마주치기만 해도 무서워 길을 돌아간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꼭 일터로 돌아갈 생각이다. 김씨가 다니는 회사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힌 후 계속 근무한 경우가 한 차례도 없었다. 회사에 피해 사실을 알린 후 사람들의 비난과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는 이들만 있었다. 김씨는 “제가 무사히 복직하게 되면 이 회사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을 되찾은 첫 사례가 되는 것”이라며 “분명 견디기 힘들겠지만 또 다른 피해자를 위한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미투 이후 자신의 삶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모두 연쇄적이라고 설명했다. 성범죄에 관대하고 가해자를 감싸는 사법부의 판결은 불투명하고 소극적인 사내 징계로 이어지고 엄벌받지 않으리란 사실을 아는 가해자는 더 당당하게 행동하고 심지어 성폭력을 반복한다. 징계 결과와 잘잘못이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사내에는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했으리란 식의 억측과 거짓소문이 양성된다.
김씨는 “용기 내 미투로 목소리를 낸 피해자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려면 이 악순환을 깨뜨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가장 중요한 건 사법적 판단을 바로잡는 일”이라며 “사법부가 성폭력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기업들도, 가해자와 2차 가해자들도 성범죄에 관대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g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