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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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장마

비가 끝없이 내리고 있다. 중부지방 기준으로 오늘이 장마 46일째다. 기상청은 중부지방 장마가 이달 중순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역대 가장 긴 장마 기록을 세울 것이다.

기상 전문가들은 올해 길고 긴 장마가 기후변화 탓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의 이상 고온 현상으로 뜨거워진 공기가 상승해 동시베리아의 대기 흐름을 막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극 기온 상승으로 극지방 주변 제트기류가 약화되면서 북극의 찬 공기가 남하해 북태평양 고기압의 북상을 저지하고 있다.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북태평양 고기압의 더운 공기와 부딪히면서 많은 비를 뿌리는 것이다. 요즘 기상청 예보가 자주 빗나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 이변이 더 자주, 더 큰 규모로 발생할 것인 만큼 대처 방식도 서둘러 업그레이드해야 할 것이다.

어제가 가을 절기가 시작되는 입추(立秋)였다. 예전엔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인 입추 무렵에 비가 닷새 동안 계속되면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태종실록’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백곡(百穀)이 결실할 때인 지금 오랫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니 기청제를 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기청제를 올리는 기간에는 성 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모든 샘물을 덮어 물을 쓰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부부는 각방을 써야 했다. 방사(房事)가 비를 부른다고 해서 금지했다고 한다.

이런 행사를 미신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외치던 시대에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임금이나 관리들의 위민(爲民)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비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장마 기간에 40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부실한 대응이 화를 키웠다. 침수가 진행되는데도 지하차도나 산책로 등의 출입 통제를 제때 하지 않아 사고를 부른 사례가 적지 않다. 춘천 의암댐이 방류하는 상황에서 의암호 인공 수초섬 고정작업을 벌이던 배가 전복된 사고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지자체가 기청제를 지내지 않더라도 위민 정신만은 되살려야 할 것이다.

박완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