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위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세비아 거리는 말들의 경쾌한 발걸음만큼이나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고색창연한 세비아성당과 귀족 정원 같은 마리아 루이사 공원, 공원 안에 별궁처럼 자리한 스페인 광장의 모습이 방금 전에 경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여유로움으로 다가온다. 뚜벅이의 수고로움을 덜어내고 편안한 시트 위에 기대어,
중세 한적한 도시를 여행하는 공작부인 마냥 여유를 즐겨본다.
마냥 즐길 수 없는 마차를 뒤로하고 숙소로 잡은 호텔 근처 쇼핑거리로 나선다.
낯선 나라에서 만나는 익숙한 브랜드들이 반갑다. 굳이 물건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익숙한 브랜드의 새로운 상품을 접하고 낯선 브랜드 물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쇼핑거리를 둘러보는 사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은 점차 보랏빛이 더해간다.
저녁에는 호텔에서 열리는 플라멩코 공연을 감상하기로 했다. 1층 로비는 벌써부터 스페인 정취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로 메워져 있다. 호텔 바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무희와 기타를 연주하는 두 남자가 공연을 시작한다. 동굴 무대에서 공연이 이뤄지던 그라나다에서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세상을 떠돌던 집시 공연이 장소를 가리지는 않았겠지만 현대식 호텔에서 벌어지는 공연은 다소 이질적인 느낌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공간은 순식간에 변한다. 기타 선율과 리듬을 맞추는 박수소리가 빨라지고 무희의 현란한 춤이 절정을 향해 갈수록 주변 공간은 그라나다 동굴처럼 본능적인 열정으로 가득 찬다. 장소와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주변을 열정으로 가득 채워 버리는 플라멩코의 매력 속에 세비아 밤이 저문다.
다음날은 세비아를 떠나 론다로 향하는 일정이다. 아침 일찍,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내 투어 2층 버스에 오른다. 관광객들이 붐비지 않은 오전 이른 시간 세비아는 고즈넉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버스는 그동안 둘러본 공간들을 슬라이드로 엮어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해 주는 듯하다. 흐르듯 세비아를 눈에 담아두고서는 짐을 꾸린다.
세비야에서 론다까지 차량으로 두 시간 거리다. 깊이 150m 협곡 양쪽 절벽 위에 세워진 론다는 협곡을 연결하는 누에보 다리로 유명하다. 척박한 지형 위에 세워져 있지만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론다 인근, 쿠에바 데 라 필레타(Cueva de la Pileta)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로,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전략적 중요도 때문에 기원전 3세기, 고대 로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에 의해 요새화되었고 카이사르 시대, 도시 칭호를 받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금은 요새의 기능을 잃었지만, 아찔한 절벽 위에 세워진 요새화된 마을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곳은 또한 투우 발상지로 유명하다. 1784년에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론다 투우장은 최대 수용 인원이 6000명에 이르는 대형 경기장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투우장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니 기대를 안고 미리 주변을 둘러본다. 도시를 만끽하기 위해서 절벽 위에 세워진 호텔에 묵기로 했다. 절벽 위 아찔한 풍광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협곡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다리의 정취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론다 협곡을 가르는 다리는 모두 세 개인데 그 가운데 가장 나중에 건설된 누에보(Nuevo) 다리가 가장 유명하다. 스페인의 건축가 마르틴 데 알데우엘라가 설계해 1793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무려 40년의 세월을 걸쳐 건설되었다고 한다. 40년이 걸릴 만큼 18세기에 협곡 위에 다리를 세우는 과정은 매우 고단했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있었을 거다. 건축가 자신조차 완공을 기념해 자신 이름을 아치에 새기려다 협곡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하니 가히 상상이 간다. 건설이 어려웠던 만큼 100m 아래 협곡 바닥까지 닿아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스페인을 소개하는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고 하니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방문 목적이 누에보 다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아름다움 이면에는 스페인 내전의 아픔도 서려 있다. 내전 당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했던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 외 릴케 등 수많은 유럽 문인들이 애정을 드러낸 론다를 만나볼 차례다.
절벽 위에 위치한 호텔의 테라스에서는 누에보 다리가 보인다. 체크인을 서두르고 절벽을 내려다보는 테라스 카페에 앉아 시원한 스페인 맥주 한잔으로 한낮의 열기를 식히고 누에보 다리를 사진에 담으며 첫 만남을 시작한다.
박윤정 여행가·민트투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