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최민화의 개인전 ‘원스 어폰 어 타임(Once Upon a Time)’은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 약 100점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1998년부터 구상하고 준비해온 회화 60점과 이 작품들을 완성하기까지 지독했던 준비과정의 드로잉과 에스키스(초벌그림) 40여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는 잘 알려진 리얼리스트다. 1982년에 지은 ‘민중은 꽃이다’라는 뜻의 예명은 그가 어떤 몸부림을 치며 1970, 80년대를 보냈는지 보여주는 작은 증거일 뿐이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속한 만화동아리의 강사였고, 1987년 이한열 열사 노제 때 쓰인 걸개그림 ‘그대 뜬 눈으로’를 그린 선전가였다. 서울미술공동체를 조직했고 민족미술협의회에 참여해 민중미술, 민족미술을 이끌었다. 6월항쟁 중 스크럼을 짜고 거리에 맨몸으로 누운 시민들을 붉은 화면에 담은 ‘파쇼에 누워’(1992)는 그 어떤 시각적 사료보다 강렬하다. 시대가 그를 운동가로 부각했지만, 그는 뛰어난 기예의 화가였다. 2017년 제18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수상자 자격으로 국공립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졌다. 사람들은 “너무 늦게 받은 상”이라 했다.
세필로 한번에 그려나간 듯한 밑그림의 완벽함, 이를 그대로 노출하는 과감함, 강렬한 시대정신 등 그의 작품에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할 요소가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장치는 색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본래 뛰어난 솜씨로 가볍게 스케치한 뒤에, 하나의 작품이 가진 단 하나의 색채를 찾으려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보인다. ‘분홍’ 연작을 보면, 일찍이 색채와 심리를 설명했던 건축가 배질 아이오니데스의 설명, “분홍은 잔혹한 빨강이 들어 있는 색”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회색 청춘’ 연작은 방황하고 배회하는 영혼들을 치유하는 색의 정답이었다.
이어 2020년, 그가 첫 구상부터 전시장에 100점을 내놓기까지 20여년이 걸린 이번 전시에서 그는 ‘신(神)들의 색’을 가져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떤 작품은 레몬색으로 빛나고, 어떤 작품은 연둣빛이 감돌고 있다. 어떤 작품은 그림이 걸린 크림화이트 톤의 벽보다 더 하얀 여백을 가졌다. 형광 색채로 빛나는 듯한데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다. 그러고 보니 흰색이 섞인 파스텔톤인데, 캔버스 천에 물든 모습이 하나같이 맑고 투명하다. 모든 작품은 다른 색들이 각기 다른 비율로 조합됐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하나의 색을 향하고 있다. 단군신화의 환웅이 인간세계로 내려오기 전, 신들의 세계에만 있던 색인걸까. 마침 그가 그린 신들의 도시(‘신시’)에선 먼 곳의 색은 또렷하고 선명한데, 가까운 곳의 색은 희미해 현대의 원근법이 깨져버린 고대의 시공간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작가는 이번에도 판타지 서사에 가장 적확한 색을 찾아냈다.
주제를 정했을 때부터 그는 이미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연구했다고 한다. 전시장 지하의 한 코너에는 그가 동쪽의 청과 서쪽의 백, 남쪽의 적, 북쪽의 흑, 중앙의 황색을 공부하며 시도한 드로잉과 오방색 자체에 집중한 작품이 전시돼, 앞서 느낀 신비로운 색감의 비밀을 알려준다.
‘옛날 예적에’ 연작으로 기억될 이번 전시는 그리스로마신화 하면 떠오르는 주인공들의 이미지가 숱하게 많은 데 반해, 단군신화나 박혁거세, 구지가, 공무도하가 등 우리 고대신화와 가사, 역사를 생각할 때 고작해야 드라마나 교과서 삽화 외에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 현실에서 시작됐다.
작품들에 흐르는 문제의식에서는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등 우리의 자랑이 작품에 인용된 데서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소와 낙타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 두거나 서구 르네상스 미술을 인용하기도 해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는다. 이밖에도 ‘공무도하가’와 같은 작품 주인공들에선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전해진다. 주어진 여건을 감내하고 순응하며 환웅의 간택을 받는 웅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 자체로 당당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한 호녀가 주인공이 돼 기존 서사를 재해석하기도 한다. 통치를 위한 정치이데올로기로 호출되곤 했던 민족 신화가 이제서야 서사 자체로 흥미로워진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그려나가면서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문명의 기원지로 꼽히는 세계 곳곳을 40여 차례 돌았다고 한다. 인류의 유산과 정신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성지들에서 그는 그림에 들어갈 도상과 색을 찾아 자신의 눈에 담았다. 사람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선물하기 위해, 정작 작가 자신은 머리로 상상하지 않고 두 발로 걷고 또 걸었다. 모든 면모가 여전히 리얼리스트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