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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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기술 판타지 이면의 인간소외를 보다

아르코미술관, 젊은 작가 5명 주제기획전 ‘더블비전’
오민수·김실비·양아치·이은희·임영주
영상·설치·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 활용
자본·기술이 부른 노동환경 변화 고발
기술발전에도 비극적 사건 왜 계속되나
잔인한 세태 꼬집고 잠든 이성 일깨워
오민수, 가변설치 ‘아웃소싱 미라클’
‘그 쇳물을 쓰지 마라.’ 이제는 노랫말이 된, 바로 그 비명임이 틀림없다. “끼익, 슝, 철컹” 인간이 흉내 내기조차 힘든 기계 소음만이 반복적으로 들릴 뿐인데도, 그 속에 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죽어간 노동의 비명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오민수(31) 작가의 작품 ‘아웃소싱 미라클’은 설치와 사운드의 힘을 보여주면서, 우리 모두가 아파서 쳐다보기를 미루거나 피했던 비극적 사건들을 한꺼번에 소환한다.

 

서울 종로구 동숭길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에서 오민수를 비롯해 김실비(39), 양아치(40), 이은희(30), 임영주(38) 젊은 다섯 작가의 영상과 설치, 사운드 매체를 활용한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본이 결합돼 만들어진 체계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제기획전 ‘더블비전(diplopia)’이다.

 

우리 사회의 잠든 이성, 무뎌진 공감력을 깨우려는 의도일까.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오민수의 ‘아웃소싱 미라클’은 강렬한 사운드와 시각효과를 낸다.

 

은백색을 띤 묵직한 메탈 스피커들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쇠사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불규칙적으로, 또 무작위로 모터의 힘에 이끌려 위로 끌려 올려갔다 수직으로 떨어진다. 견고한 스피커가 쿵 떨어져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좌절하게 되는 현실 앞에 털썩 주저앉는 사람처럼 보인다. 또는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방향 사이에 힘없이 매달린 인간의 처지 같기도 하다. 이 움직이는 스피커들에서 증폭되는 기계음은 어느 공장이나 창고의 소리임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스산한 바람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기계음은 분명 냉정한데, 슬픔이 실려 있고, 생명이 없는 사물인 스피커들은 살아 있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작가는 직접 발품을 팔아 이 오묘한 사운드의 힘을 만들어냈다. 그는 지난 4월 4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현장을 찾아 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사고 직후 잿더미가 된 창고 내부에선 쇳덩이의 기계들만이 삐거덕거리고 “끼익 끽” 마찰 소리를 내며 살아남아 있었다. 녹음은 그 현장의 공기를 담아내고 애도하기 위한 작가만의 방편이었다.

김실비, 영상 '회한의 동산' 한 장면

4차 산업혁명이니 언택트니 하는 기술의 발전 판타지 뒤에는, 증설되는 물류창고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노동이 존재한다. 작가는 실제 물류창고를 오가며 배달노동을 했고, 동료가 과로로 죽음에 이른 경험을 갖고 있다. 작가는 참사 현장에서 녹음한 사운드를 소재로, 속도에 의해 소리가 왜곡되는 현상인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 변형시켜 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은희, 영상 ‘어핸드인어캡’의 한 장면

이은희 작가의 영상 작품 ‘어핸드인어캡(AHANDINACAP)’ 역시 발길을 이끄는 작품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기에 결함이 있는 신체, 결함이 없는 신체로 구분되며, 노동할 수 있는 신체로 회복되기 위해 기술과 과학이 동원되는 방식을 3채널 영상으로 보여준다. 다친 사람들이 기계팔, 기계다리를 얻어 다시 일하는 몸을 얻는 장면을 보여주며, 장애라는 어원에 담긴 ‘일할 수 없는 몸(disable-bodied)’의 의미를 탐구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할 수 있는 몸,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이분법적인 구분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

이은희, 영상 ‘블러드 캔 비 베리 배드’의 한 장면.

산재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노동법 정보를 주는 어느 유튜브채널에서 발췌한 영상 속 강연자는 열정적이다. “치료가 종결됐을 때 장애(판정)는 어떻게 받는 게 좋을까요, 머리에 대한 부분, 그리고 팔, 다리, 또 손가락에 대한 부분, 척추 추체간의 장애는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비뇨기과적인 것은, 다리에 대한 장애, 다리 중에서도 발목관절은…” 노동하던 사람의 육체가 고깃덩어리처럼 구분되고 등급 매겨지는 현실은 멀리 있지 않았다. 즐거운 대화인 양 경쾌한 분위기의 영상 배경에 흐르는 세련된 드럼 비트까지 더해져 잔인한 세태가 꼬집힌다.

임영주, 영상 ‘세타’ 한 장면

위기의 대안 과학, 최첨단 기술의 판타지 이면의 생명정치와 인간소외를 다층적으로 살펴보는 전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사건은 왜 일상이 되었는가 묻는다. 11월 29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