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고교생에 이어 전북 고창과 대전에서도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주사를 맞은 70대와 80대 노인이 잇달아 숨졌다. 세 사람의 사망 원인과 독감 백신의 직접적 연관성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상온 노출 사고에 이은 사고라서 시민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보건당국은 사망 원인 규명과 역학 조사에 착수했다.
20일 대전시와 전북도에 따르면 대전 서구에 사는 A(82)씨가 이날 오전 10시쯤 동네 의원에서 독감 백신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뒤 5시간 만에 숨졌다. 오후 2시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A씨를 발견한 가족이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1시간가량 지나 숨을 거뒀다. A씨가 맞은 백신은 한국백신 코박스인플루4가PF주로 나타났다. 얼마 전 상온 노출로 효능 저하 우려가 제기되거나 백색 입자가 검출돼 논란이 된 백신과 다른 종류다. 서구 한 관계자는 “이 남성이 고혈압이나 당뇨 등 기저 질환이 없고, 이날도 건강한 상태에서 백신을 맞은 것으로 파악됐다”며 “의원에서 접종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전시 관계자는 “(A씨 사망 원인이) 독감 백신 접종과 연관성이 있는지 조사하기 위해 역학조사관이 의료 기록 등을 검토하게 된다”며 “최종적으로는 질병관리청에서 위원회를 열어 판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7시쯤 고창군 상하면에서는 B(78·여)씨가 자택에서 숨져 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주민은 “어제 오후 5시쯤 통화에서 오늘 고혈압약을 처방받으러 면내 병원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며 “아침 7시쯤 (B씨의) 집을 찾아가 보니 방안에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B씨는 전날 오전 9시쯤 상하면 한 의원에서 무료 독감 백신을 접종했다. B씨는 최근 논란이 된 백신과 다른 보령바이오파마 보령플루를 맞았다. B씨는 생전에 혈압약을 복용했고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앓았지만 백신 접종 때까지 이상 증세는 없었다고 한다. B씨가 방문했던 의원에서 최근 동일한 백신을 접종한 주민은 모두 99명으로 파악됐다. 고창군 보건소는 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결과, 연결된 94명에게서 이상 반응이 없었다고 밝혔다. 나머지 5명에게는 담당 공무원을 보내 건강 이상 유무를 확인 중이다. 전북도 보건당국 관계자는 “부검 등을 통해 정확한 사망 원인을 신속히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4일 인천에서는 고교 남학생(17)이 민간 의료기관에서 국가 조달물량 무료 백신을 맞고 이틀 뒤 숨졌다. 질병관리청은 이 학생과 같은 의료기관에서 동일 백신을 맞은 32명한테서 이상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질병관리청은 아직까지 이들의 사망과 독감 백신 접종 간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정확한 사인을 가리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백신 맞아도 괜찮나” “보관 제대로 했나요” 시민 문의 빗발
“매년 독감 접종은 꼭 했는데…. 올해는 잘 모르겠어요.”
6살, 3살 아이를 키우는 ‘직장맘’ 최모(38)씨는 본인과 자녀의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접종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최근 독감백신을 맞은 사람이 숨지는 사례가 나오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백신 상온 노출 이야기를 듣고 꺼림칙한 마음에 접종을 미뤘었는데 사망 소식을 들으니 불안감이 더 커졌다”며 “백신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난 건 아니지만 백신의 안전성에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10대 고교생에 이어 70·80대 노인까지 독감백신 접종 후 숨지는 사례가 잇따르자 백신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보건당국은 백신 접종과 사망 간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얼마 전 독감백신 유통 문제에 예민해진 시민들 사이에선 백신 접종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기류다.
20일 전국 보건소와 병·의원에는 독감백신의 안전성을 묻는 문의가 이어졌다. 이날 오후 대구 동구보건소에서는 직원 3~4명이 쉴 새 없이 울리는 문의전화를 받고 있었다. 직원들은 쏟아지는 전화에 대응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문의는 ‘접종을 꼭 해야 하느냐’, ‘백신이 안전한 게 맞냐’, ‘접종 후 열이 나는데 괜찮냐’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동구보건소의 한 관계자는 “백신이 안전한지 묻는 전화가 하루에 200통이 넘게 걸려온다”며 “불안감이 널리 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소아과 관계자도 “지난해와 다르게 백신을 맞아도 되는지 물어보는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며 “어떤 업체의 백신을 쓰는지, 백신이 언제 들어왔고 보관은 어떻게 했는지 꼼꼼하게 물어보는 분도 있다”고 전했다. 무료 독감백신을 맞으러 부산의 한 보건소를 찾았다가 갑자기 발길을 돌린 70대 노인은 “보건소에서 기다리다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이) TV에서 독감 접종 후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고 집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특히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일단 접종을 미루는 경우가 많은 분위기다. 3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모(37·여)씨는 “아이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접종을 하는 건데 지금은 꺼려진다”며 “사망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질 때까지 지켜보다 결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7살, 3살 아이를 키우는 정모(38)씨도 “올해에는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독감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걱정은 오히려 적은 편 아니냐”며 “접종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규모 접종 예약 취소 사태는 없는 상황이다. 이날 서울 강동구의 한 이비인후과 앞에도 독감백신을 맞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예방 접종을 하러 왔다는 이모(42)씨는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백신이 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특히 올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있어서 접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질병관리청은 이날 독감 국가예방접종 사업을 중단할지 묻는 질문에 “현재까지 확인된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 사업을 중단할 근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전문가들도 백신 접종을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최원석 고려대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 백신은 아주 오랫동안, 다수에게 접종해온 백신으로 최근 사례처럼 단기간에 사망이나 중증 위험 반응에 이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며 “쉽사리 인과관계를 평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기저질환자의 경우 일시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된다면 접종 시기를 미룰 필요는 있다”면서도 “백신 접종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전·고창·대구=임정재·김동욱·김덕용 기자, 김승환·김유나 기자, 전국종합 kdw763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