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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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걸렸던 예비신부… ‘새로운 피’ 이식으로 일상 되찾아 [심층기획]

버려지는 제대혈
27세 김단유씨 사연 보니
김씨, 가족 골수 불일치로 절망에 빠져
“제대혈 기증자 덕에 또 다른 삶 선물 받아
이식받은 날은 제2의 생일… 평생 감사”

“백혈병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죠.“ 2년 전 김단유(27·여)씨는 결혼을 앞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결혼 준비를 하며 바쁘게 보내던 2018년 가을, 어느 날부턴가 허리가 아팠다. 물리치료를 받고 신경주사까지 맞았지만 통증은 일시적으로 사라질 뿐,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두 달 만에 찾은 큰 병원에서 “백혈병인 것 같으니 골수검사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내가 무슨 백혈병이야.” 믿지 않았다. 평소 마라톤과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정도로 활동적인 그였다. 아픈 골수검사도 ‘내가 백혈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오기’로 참았다. 얼마 뒤 진단명이 나왔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2018년 12월, 몇달 뒤 식을 올릴 예비신부였던 김씨는 머리를 삭발하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항암치료는 고통스러웠다. 통증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지쳐 잠드는 날이 많았다. 몸보다 힘든 것은 마음이었다. 병실에 누워있을 때 다른 이들이 웃고 대화하는 소리가 들릴 때면 그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창밖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과 자신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치료를 위해선 조혈모세포(혈액 성분인 백혈구와 적혈구·혈소판·면역세포 등을 만드는 모세포. 골수나 아기의 태반·탯줄에 존재) 이식이 필요했다. 동생에게서 이식을 받으려 했지만 검사 결과 불가능했다. 기증 신청자 중에서도 일치자를 찾지 못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때, 제대혈(탯줄 혈액)을 통해 조혈모세포를 이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기증한 제대혈이었다. 어두웠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2019년 7월 10일. 두 명이 기증한 제대혈이 주삿바늘을 통해 김씨의 몸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피를 받고 다시 태어난 날. 김씨는 그날을 ‘두번째 생일’이라고 부른다. 이식 후 숙주 반응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김씨는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식 5개월 뒤 처음으로 혼자 외출을 했고, 이식 7개월 뒤에는 백혈병 진단 후 쇄골 인근에 계속 달고 있던 히크만카테터(혈액암 환자가 약물 주입·채혈을 위해 정맥에 삽입하는 관)도 제거했다. 그리고 지난 7월, 이식 1주년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 2년 차 신혼부부인 김씨는 현재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 급성 백혈병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김단유씨가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김단유씨 제공

김씨는 기증자에 대해서는 혈액형이 B형이란 점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그들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하며 산다. 김씨는 1일 “제대혈 기증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제게 새 생명을 준 기증자분들에게 너무 감사드려요. 저한테 또 다른 삶을 선물해줬어요.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거예요.”

 

김씨 같은 혈액암 환자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제대혈은 출산 시 누구나 기증할 수 있다. 제대혈은 과거 출산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여겨져 모두 버려졌지만, 최근에는 난치병 환자 등을 위한 조혈모세포 공급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분만 과정에서 의사가 채취해 기증자에게 별다른 수고가 들어가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제대혈이 보관이나 기증을 선택하지 않아 그냥 버려진다. 제대혈에 대한 관심 부족과 편견 등으로 기증은 점점 줄고 있다.  

제대혈 이식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난 6월 건강을 회복한 김씨의 모습. 김단유씨 제공

◆백혈병 환자 살리는 제대혈…기증 절차 간단

 

제대혈(Cord Blood)이란 신생아의 탯줄과 태반에서 나오는 혈액이다. 조혈모세포와 중간엽줄기세포 등이 들어있어 백혈병 등 혈액 질환과 유전·대사 질환 등을 치료하는 데 쓰이며 출산 시 단 한 번만 얻을 수 있다. 백혈병 환자들에게는 조혈모세포 이식이 필요한데, 골수·말초혈 조혈모세포는 조직적합성항원(HLA)이 6개 모두 일치해야 이식을 할 수 있다. 통상 형제·자매는 HLA 일치율이 25%고, 타인은 2만분의 1 수준이어서 타인의 골수·말초혈 조혈모세포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제대혈의 조혈모세포는 HLA가 3개 이상만 일치하면 이식이 가능하고 이식 후 거부 반응도 적다.

 

제대혈 보관은 가족제대혈과 기증제대혈 형태로 나뉜다. 가족제대혈은 150만∼400만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아이의 제대혈을 업체에 보관하는 것으로 향후 자신의 가족에게 제대혈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다. 기증제대혈은 비용 지불 없이 공공제대혈은행에 보관되며, 난치병에 걸린 국민 누구나 이식받을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100여개의 공공제대혈은행이 있고, 국내에서는 2006년 첫 공공제대혈은행(서울시 제대혈은행)이 설립됐다. 현재 성모병원·대구파티마병원·동아대병원에서도 운영 중이다.

제대혈 기증 절차는 간단하다. 출산 전 공공제대혈은행에 기증을 신청하면 집으로 ‘제대혈 기증 키트’가 오는데, 출산 시 병원에 키트를 가져가 의사에게 전달만 하면 된다. 제대혈은 의사가 분만 과정에서 채취해 병원 측에 보관하며, 공공제대혈은행 직원이 수거한다. 또 탯줄을 자르고 난 뒤 채취하기 때문에 산모나 아이에게 고통이 있거나 분만 과정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수거된 제대혈은 검사 후 이식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보관되고, 부적합한 제대혈(유핵세포 수 기준 이하 등)은 폐기되거나 연구용으로 사용된다.

 

◆버려지는 제대혈…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빛 

 

하지만 간단한 절차에도 불구하고 기증은 많지 않다.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국내 제대혈 기증은 △2015년 3815건 △2016년 3043건 △2017년 2030건 △2018년 1904건 △2019년 1291건으로 매년 줄고 있다. 지난해 기증 제대혈은 2015년의 3분의1 수준이다. 출산율이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5년 출생아(43만8000명) 중 제대혈 기증 비율은 0.87%였지만, 이 비율은 2016년 0.75%, 2017년 0.57%, 2018년 0.58%, 2019년 0.43%로 줄었다. 2015년 태어난 아이 1000명 중 9명이 제대혈을 기증했다면 지난해에는 1000명 중 4명 정도만 제대혈을 기증한 것이다. 기증제대혈을 이식받은 사람도 2015년 52명(제대혈 90유닛)에서 지난해 37명(제대혈 66유닛)으로 줄었다. 현재 출생아 중 가족제대혈을 보관하거나 기증을 택하는 경우는 10%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제대혈은 그냥 버려진다. 

이식을 기다리는 이들은 매년 늘고 있다. 조혈모세포 이식대기자는 2014년 2761명에서 2018년 4497명으로 62.9%나 증가했다. 지난해 이식대기자의 평균 대기일은 1726일(4.7년)로, 2018년(1682일)보다 44일 늘었다.

 

◆관심 적은 기증…기증 활성화 필요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17개 제대혈은행(공공·민간 포함)의 지난해 말 기준 보관 제대혈은 51만3652유닛으로 이중 91.2%(46만8221유닛)가 가족제대혈이었고 기증제대혈은 8.8%(4만5430유닛)에 그쳤다. 제대혈 보관 자체도 적지만, 그나마 보관을 하는 택하는 사람들도 기증보다는 가족제대혈 방식을 많이 택해 해외에 비해 기증제대혈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같은 상황을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정보 격차’가 꼽힌다. 임신부들은 민간 업체를 통한 가족제대혈 보관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많지만, 제대혈 기증에 대해서는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든 상황이다. 대부분의 대형 산부인과에는 가족제대혈 보관 업체의 홍보부스가 있는데, 일부 업체에서는 ‘제대혈을 기증하면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쓰지 못한다’며 기증보다 보관이 낫다고 권한다.

지난해 출산 시 제대혈을 기증한 이모(31)씨는 “산부인과에서 임신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가족제대혈 업체의 부스였는데, 기증할 것이라 하니 업체에서 어리석은 선택이란 식으로 말해서 언짢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씨가 기증을 택한 것은 ‘선순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아이한테 필요할 때 쓰겠다’며 보관을 택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회적으로 기증이 많아지면 내가 필요할 때 다른 이의 제대혈을 받을 수 있는 선순환이 되지 않겠나”라며 “기증을 안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지만 잘 몰라서 버려지는 제대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살리는 씨앗이 될 수 있으니 기증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제대혈을 기증해도 환자에게 제대로 쓰이지 않을 것이란 오해도 기증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과거 연구용으로 기증된 이식 부적격 제대혈을 일부 병원에서 미용 용도 등으로 불법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제대혈 보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상황이다. 임신부들이 많이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기증해봤자 제대혈은행 배만 불리는 것 아니냐,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냐”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병관리청은 최근 부적격 제대혈 관리 체계가 강화됐다는 입장이다. 과거에는 부적격 제대혈을 정부에서 별도 관리하지 않았지만, 지난 4월부터 부적격 제대혈도 제대혈정보센터에 전수 등록해 관리하고 있다. 윤종현 서울시 제대혈은행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제대혈 기증은 내 아이의 탄생이 또 하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고귀한 일”이라며 “최근 공공제대혈은행들이 제대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기증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5살 딸아이가 있는 김모(34)씨도 누군가의 ‘선한 선택’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88㎏의 건장한 체격이었던 그는 지난해 여름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몸무게가 한때 41㎏까지 내려가며 힘든 시간을 겪었다. 올해 3월 이름 모를 이가 기증한 제대혈을 이식받은 뒤 조금씩 회복 중이다. 김씨는 제대혈을 이식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김씨는 “‘저 피가 나를 살리는 피구나’란 생각을 했다. 전혀 모르는 분이지만 새 생명을 준 기증자에게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제대혈 기증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증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 선택으로 하나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