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택배 기사가 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과로사였다. 이 가슴 먹먹해지는 사건으로 날마다 400여개 물량을 새벽까지 배송하는 택배 기사들의 살인적인 노동 현실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택배 물량이 증가한 것은 비대면 방식의 일상화가 부른 불가피한 현실이다. 택배 기사의 노동 시간이 늘고, 올해만 13명이 과로로 목숨을 잃을 만큼 노동 강도가 세졌다. 택배 기사는 특수 고용형태 근로종사자로 산재보험 대상이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이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제 목숨을 걸고 일한다.
노동의 범주와 형태는 넓고 다양하다. 노동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파리의 에펠탑도, 중국의 만리장성도, 인도의 타지마할도 노동의 산물이다. 노동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한 활동들, 즉 밭을 일구고 가축을 돌보는 일이고, 빵을 굽고 거리를 청소하는 것이며, 거래와 계약을 맺고, 집안을 건사하는 행위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떤 현상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자기 시간과 신체 에너지를 투여하는 행위다. 물건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일은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노동이다. 택배 배송이 이에 해당한다. 건설 현장이나 공장은 물론이거니와 기업, 공항, 병원, 쇼핑몰에서 일하거나 소설가나 자영업자나 장의업자가 다 노동자다. 글을 써서 나오는 수입에 기대어 사는 나는 ‘문장노동자’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한 새내기 국회의원은 자신을 ‘입법노동자’라고 불렀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노동은 기술과 숙련된 노동, 자기 시간을 임금과 맞교환하는 일이다. 이때 노동자는 고용주와 계약을 하고 자기를 맡긴 ‘복종적 주체’다. 후기 근대 사회에 나타난 노동자는 ‘성과주체’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들을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이들은 누구의 강요 없이 일하며, 성과를 내려고 자기를 다그친다. 이런 맥락에서 성과주체는 자신을 향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성과주체로 나선 노동자는 타자가 강제하는 의무를 지는 대신 자유의지와 자기 선택을 존중하고, 쾌락과 즐거움에 따른다. 철학자가 진단하는 오늘날 죽음으로 번지는 ‘피로사회’는 모든 이들이 성과주체로 나서서 자기 착취를 한 결과다.
노동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신체 역량을 초과한 노동은 우리 몸의 근육과 신경계에 침투하고, 피로의 포화 상태에 이르게 한다. 피로는 노동의 음침한 응달이다. 문제는 존재의 약동을 앗아가는 지나친 피로다! 택배 기사는 과로사 직전 “너무 힘들어요!”라고 호소했다. 이는 죽을 만큼 피로하다는 외침이다. 피로가 작게 쪼개진 죽음이라면 과로사는 작은 죽음들의 누적이 만든 큰 죽음이다. 이 희미한 죽음의 전조(前兆)는 자기 의지에 반하는 현재에의 예속화에서 나타난다. 과로사는 소진 증후군이 가 닿은 극단이다. 소진 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한병철)이다. 노동자는 심장 정지 같은 신체 죽음에 앞서 피로가 덮친 상태에서 소진 증후군을 맞는다. 이것은 의사(疑似) 죽음, 즉 신경 시스템의 과부하로 인한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이다.
노동은 생업의 기반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어느 사회나 건강한 사람이 노동을 배제하고 무위도식하며 사는 행태는 비난받는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고, 알베르 카뮈는 “노동하지 않는 영혼은 기어코 부패한다”고 말한다. 노동으로 제 생계를 해결하고, 사회와 결속하며 제 실존의 뿌리를 사회에 내리는 건 중요하다. 노동의 숭고함은 그것이 제 생계 수단을 넘어서서 제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을 부르는 노동에 내몰린 택배 기사 같은 이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는 안 된다. 노동은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의 생존 이익을 북돋는 일이 되어야 한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