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화려한 컴퓨터그래픽보다 문장 단 한 줄이 더 생생하다. 무대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가 합쳐졌을 때 무대의 힘은 놀랍다.
연극 ‘오만과 편견’이 그렇다. 셰익스피어 다음 가는 인기작가로 꼽히는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 원작을 2인극으로 만들었다. 원작소설 200주년을 기념해 배우로도 활동하는 젊은 극작가 조안나 틴시, 그리고 애비게일 앤더슨 연출로 영국 솔즈베리 극장에서 2014년 초연된 작품이다. 지난해 국내 초연이 대호평받은 덕분에 다시 1년 만에 절찬 공연 중이다.
왕과 귀족·신사(紳士·gentry), 그리고 평민으로 계급이 나뉘었던 19세기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총명하며 매력적인 베넷가 둘째딸 리지가 오만한 명문가 신사 다아시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는 과정은 원작 거의 그대로다. 인터넷 무비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1938년부터 TV, 영화로 49회나 만들어지고 심지어 ‘좀비’판까지 나온 작품인데 2인극으로 탄생하면서 새로운 매력이 만들어졌다.
두 명의 남·여 배우는 무려 21명이나 되는 등장인물을 ‘A1:엘리자베스(리지)·미시즈 베넷·리디아·미스터 빙리·캐롤라인 빙리…’, ‘A2:다아시·제인·미스터 베넷·키티·미스터 콜린스·위컴…’ 식으로 나눠 맡는다. ‘멀티 배역’이 흔해도 이 정도면 아찔할 지경인데 배우들 감칠맛나는 연기가 그 자체를 감상포인트로 만들었다.
베넷 부부와 딸들이 등장하는 첫 장면을 볼 때만 해도 과연 역할 구분이 될지 걱정스러웠는데 금세 익숙해진다. 오히려 천연덕스러운 역할 변경을 기대하게 된다.
리지는 치맛자락을 젖히면 빙리가 되고 손수건을 손에 들면 미시즈 베넷으로 변하는 식이다. 다아시는 코트를 여미면 수줍은 첫째 딸 제인으로 바뀌었다가 모자를 쓰면 푼수기 다분한 콜린스 목사가 된다. 여기에 캐릭터를 상징하는 손수건, 지팡이, 모자, 부채 등의 소품을 활용해 멀티 배역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실상 배우 단둘인 무대가 등장인물로 북적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역시 배우들 연기 덕분이다. 공연시간 160분을 꽉 채워야 하는 대사를 암기하는 것은 물론 나름의 개성을 설정해 생생한 여러 인물을 한 무대에서 표현해야 한다. 배우에겐 큰 도전이며 관객에겐 큰 재미다. 박소영 연출은 “참 쉽지 않은 작품이다. 특히 배우에게는 가혹한 작품”이라며 “2인극이기에 상대방의 호흡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방대한 대사와 동선을 빠르게 익힐 줄 아는 배우여야 한다. 수많은 배역과 장소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 연극은 배우들의 호흡으로 이 모든 것을 가볍게 표현해 버린다”고 설명했다.
연기 덕분에 보는 이의 상상이 더해지도록 만든 불완전한 구조물과 의자 등이 전부인 간소한 무대는 베넷 가족의 롱본 저택, 무도회가 열리는 네더필드의 빙리 저택 등으로 충분히 탈바꿈한다. 리지와 다아시가 춤추며 대화로 서로를 탐색하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치 선남선녀가 줄지어 춤추는 화려한 무도회장 속에서 두 주인공만 따로 빛나는 듯하다.
여배우가 연기하는 빙리가 남배우가 맡은 제인에게 무릎 꿇고 청혼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애초 2인극일 뿐 ‘젠더 프리(Gender-Free·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함)’를 목표로 두지 않았다는 게 연출의 변이다. 그런데도 사랑과 아름다움에는 정해진 규칙도 차별도 없다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남 보기에 괜찮은 결혼이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고, 상속권 없는 여성은 시집 잘 가는 게 유일한 상책이던 19세기 영국 사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다. 하지만 지금 세태도 크게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사랑 없는 결혼을 택한 리즈 친구 샬롯은 이렇게 말한다. “네 기분이 어떨지 알아. 아주 많이 놀랐겠지. 너한테 프러포즈한 지 얼마 안 되니까…. 그런데 있잖아…. 난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건 안락한 가정생활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너도 내 결정을 이해하게 될 거야.”
출연진은 초연 멤버인 김지현, 정운선, 이동하, 이형훈에 백은혜, 홍우진, 신성민이 새로 합류했다. 배우마다 다양한 느낌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만큼 여러 번 보는 ‘회전문 관객’에게 제격인 작품이다. 보고 나면 영화나 책도 보고 싶어진다.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11월 29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