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야 재밌다.”
허리 뒤로 뒷짐을 진 백발의 어르신이 검정 뿔테 너머로 그림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앞에 걸려 있던 작품은 윤상윤(42) 작가의 ‘왼손 그림’이었다. 그는 이어 윤 작가의 ‘오른손 그림’ 앞으로도 다가가 천천히 그림을 살폈다. 윤상윤 개인전에 예고 없이 찾아와 조용히 작품을 둘러보던 그는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윤 작가를 가르친 스승, 최상철(74) 화백이었다.
윤 작가의 오른손 그림 앞에서 “이렇게 그리기가 쉽지 않은 거죠? 제자 실력이 많이 늘었나요?”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스승은 “그럼요. 재주가 아주 많은 거죠”라고 답했다. 윤 작가는 “선생님 앞에 작품을 내놓는 건 항상 부끄럽다”며 얼굴을 붉혔다.
양손으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여온 윤 작가의 개인전 ‘온리 슈퍼스티션(Only Superstition)’이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아틀리에 아키에서 시작됐다. 관람객을 맞는 26점 모두 올해 그려진 신작이다. 윤 작가는 오른손으로는 세밀한 묘사력을 뽐내는 구상회화를 그리고, 왼손으로는 한번에 투박하고 자유롭게 그려 표현주의적 요소가 듬뿍 담긴 그림을 그린다. 전시공간에는 그의 양손 그림들이 만드는 2중주가 흐른다. 마치 서로 다른 두 작가의 작품을 보는 듯하면서도, 물감을 완전히 펴바르지 않고 붓질의 결이 느껴지는 특유의 방법으로 그린 공통점이 모든 그림들을 윤상윤만의 톤으로 어우러지게 한다. 그가 붓질의 흔적을 남겨 놓은 자리마다 오일을 머금은 유화물감은 더욱 반짝거린다.
그는 오른손으로 실력이 절정에 달한 사람 같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왼손으로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어쩌다 양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됐을까. 윤 작가는 왼손잡이로 태어나 어린시절 오른손잡이로 바꿨다고 한다.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내 오른손은 기교를 부릴 줄 알고 단련된 손이다. 왼손은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손이다. 우연한 표현을 해보고 싶은 욕망으로 대학원생 시절부터 왼손 드로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오른손 그림은 금방이라도 찰랑거릴 듯한 물, 화면을 조화롭게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색채, 사람들의 옷깃과 머리칼, 흩날리는 꽃과 나뭇잎과 그림자까지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으로 놀랍다. 무엇보다 극사실적 현실을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잔잔한 물속에 발이 잠긴 모습은 분명히도 판타지여서 신비롭다. 그의 오른손 그림은 그렇게 저마다 소재를 달리하면서도 잔잔한 물, 그 물에 발이 잠긴 사람들, 그 사람들 위의 한 사람이 3개 층으로 구조화돼 있다는 공통점이 특징이다. 이 구조는 초현실적 풍경화가 주는 신비로움의 결정타다.
윤 작가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바닥에 깔린 물을 인간의 무의식으로, 그룹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자아로, 그 위 단 한 명의 개인을 초자아로 생각하며 이런 구조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꼭 이 틀에서 그림을 느끼기보다 관객이 넓은 영역에서 자유롭게 해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군중 속에 우뚝 서 떠오른 한 사람은 마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한 위대한 개인 같기도, 군중에서 떨어진 외로운 자아 같기도 하다. 영국 첼시예술대 대학원 유학시절 이방인으로서의 경험 역시 집단과 개인의 관계, 혹은 집단을 바라보고 조망하는 개인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왼손 그림에서도 그가 영국 첼시에서 머물던 시절, ‘영국 국민’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살던 히피들의 모습에 그가 얼마나 마음을 사로잡혔는지 느껴진다. 왼손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 중 상당수가 히피들의 결혼식, 히피들의 축제, 히피들의 놀이다. 오른손 그림에 등장하는, 중세 어느 마을에서 열리는 그림교실이 정돈된 아름다움을 주는 것과 대비돼 더 즉흥적이고 자유로워 보인다. 그가 본 사진 등을 토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 느꼈던 이미지 위주로 수정 없이 한 획에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왼손 그림들을 완성했다고 한다. 다음달 12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