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격의 순간에 최소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자세를 숙이지는 않았다.”(연평도 포격전 당시 해병 연평부대에서 중사로 복무했던 안준오씨)
2010년 11월 23일.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인접한 연평도는 불바다로 변했다. 북한이 기습 포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북한군이 쏜 포탄이 빗발치는 위기 상황.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현장을 지키던 해병 연평부대원들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북한군 포탄이 낙하한 지 10여 분만에 대응 사격을 감행, 북한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현지 해경과 경찰, 소방 당국이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간인과 군인 가족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켰고, 섬 곳곳에서 일어난 불을 껐다. 군인에겐 생명이나 다름없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북한 도발에 맞선 해병대
북한의 도발에 맞서 해병 연평부대는 불굴의 의지로 반격을 감행했다.
치열했던 당시 상황은 2011년 4월 해병대사령부가 발간한 연평부대원의 수기 ‘우리는 승리했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수기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표기된 계급은 2010년 11월 23일 기준이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연평부대 포7중대는 해상 사격훈련 중이었다. K-9 자주포 6문 중 2문은 대기했고 4문으로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북한 방사포탄 공격을 받고 13분만에 대응 사격에 나섰다.
“포탄이 낙하하는 상황에서 즉각 사격준비를 지시했다. 중대원들은 차분하면서 대담하게 사격을 준비했고, 2문이 준비 완료 보고를 했다. 그 중 1문에서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3번이나 ‘사격 준비 끝!’을 외쳤다.”(대위 김정수)
“포반에 ‘쾅’ 하면서 포탄이 떨어졌다. 장비를 살폈는데 전시기에 고장코드에 불이 들어와 확인해보니 구동제어기에 불량 코드가 보였다. 반자동으로 사격을 하겠다고 중대장님께 보고했다. 일방적으로 맞고 당할 수 없어 포반들과 함께 신속히 탄과 장약을 준비해 반자동으로 3차 사격에 가담해 사격을 실시했다.”(하사 김영복)
포7중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그 시각, 다른 연평부대원들도 제자리를 지키며 임무를 수행했다.
“소대장님이 명령을 내렸다. ‘포격이 연평도에 떨어졌다. 우리 방공총원은 위협사격준비 하라.’ 난 즉시 사격준비에 들어갔지만 조금 두려웠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목소리,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평소에 훈련했던 대로만 전투배치 붙어있어!’ 뒤쪽에서 부소대장님과 반장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연평도에 포격이 떨어지자마자 당섬에서 포격을 뚫고 방공소대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제야 안심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할 수 있었다.”(일병 김재용)
“난 발칸 포상으로 올라가 반장에게 상황을 물었다. 반장은 포상에서 관측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대공 상황에서 끝까지 남아서 싸우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끝까지 남아 싸우고 싶었으나 상급부대 명령에 의해 소산(흩어져 피하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장병들의 용감함을 느낄 수 있었다.”(중위 임장원)
◆동료의 고통에 직면한 대원들
짧지만 격렬했던 포격전으로 해병대는 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고락을 함께 하던 동료 해병의 고통은 대원들을 힘들게, 또는 분노하게 했다.
“급히 올라간 의무실 복도에는 해병들이 흘린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응급실 안쪽에는 서서히 숨이 멎어가는 해병이 있었다. 피로 얼룩진 손을 잡고 기도를 했지만, 해병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지혈이 되지 않아 피가 계속 흘러도, 나를 보며 웃어주는 해병의 모습에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깨달았다.”(대위 하승원)
“환자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비명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진정하려고 노력하면서 환자들을 둘러보니 같이 생활하던 인원들이 많이 다쳤다. 그때의 억울함과 분통함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후송이 마무리된 후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엔 전우들의 피가 묻어있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병장 이재광)
“의식을 잃어가는 문광욱 일병을 봤다. 그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두려웠다.”(이병 강병욱)
“문광욱 일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멍한 순간이었다. 소대 전입한 지 1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소대에 와서 면담했을 때 기억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확인을 위해서 의무실로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폭음 소리와 전사를 했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부대장님 옆으로 가서 다시 보고를 드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대위 김홍성)
“부대별 피해를 조사하라는 부대장님 지시를 받아 확인을 했다. 처음에는 경상자 1~2명이었지만, 차츰 늘어만 갔다. 결국에는 전사자를 보고받았고, 군의관이 확인한 결과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근거리에 있는 적이었다면 소총을 들고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다.”(대위 이성욱)
갑작스런 기습 공격에도 해병 연평부대는 최선을 다했다. 강력한 반격으로 무도와 개머리에 있던 북한군을 타격했으며, 연평도 주민들을 무사히 피신시키고 치안 공백 해소에도 적극 나섰다.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었던 월터 샤프는 “해병대의 즉각적인 대응 덕분에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연평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찬사를 보냈다.
◆10년 지나도 민간인 사살 여전…‘바이든 리스크’ 우려도
오는 23일은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로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한 위험은 낮아졌다. 서해에는 해상 완충수역이 설정되면서 사격훈련이 중단되고 해안포문도 닫혔다.
하지만 서해 NLL 일대는 언제든 남과 북이 충돌할 수 있는 곳이다. 휴전선과 달리 북한군이 우리 군을 압도할 수 있고, 수도권과 인접한 요충지라는 점에서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NLL은 ‘위기의 바다’가 될 위험이 존재한다.
연평도 포격 당시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은 채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던 북한의 태도는 10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다. 최근 해양수산부 공무원 북한군 피격 사건에서 보듯 북한은 민간인에게도 거침없이 총부리를 들이대는 상황이다. 민간인의 생명은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법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서해 완충수역에 있는 창린도에서 포격을 감행한 바 있다. 남한을 바라보는 북한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선으로 미 행정부가 교체되는 것도 변수다.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조 바이든 행정부는 원칙적인 자세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국을 위협할 우려도 있다.
미국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전략적 도발보다는 한국을 건드려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다. 내년 한반도 정세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대목이다.
9.19 군사합의로 서해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한 평화가 온 것은 아니다. 잠깐의 휴식일 뿐이다. 남북, 북미 대화가 사실상 멈춘 2020년의 평화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다.
서해에서 위기가 고조됐을 때, 현장에 있는 군인들은 그 위기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10년 전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