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미국 대선 이후 약 20일, 그리고, 바이든 당선자의 당선이 확실하게 된 날로부터는 16일 정도 지나서야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바이든의 당선을 인정했다. ‘사실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본인이 결과에 승복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연방정부 예산을 통해 바이든 인수위의 활동을 돕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결과에 대한 승복과 더불어 선거의 승자를 백악관에 불러 미국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도 현실을 인정해 가는 듯하다.
이번 미국의 선거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 특히 대통령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다시 제자리로 복귀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관심이 쏠렸다. 사람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결국에는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에 의해 그 제도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형식을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그 형식이 만들어진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데에서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중 하나는 그가 포퓰리스트적인 통치 방법을 통해 본인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라는 단어는 보통 정치의 상대방을 공격할 때 많이 사용된다. 보통 본인이 하면 장기적 관점에서 국민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하게 되면 그건 언제나 단기적이고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행위라고 비판한다. 정책이란 것은 가치관과 이념을 포함한 주관적 인식의 개입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책의 내용을 가지고 포퓰리스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표를 얻기 위한 행동을 한다고 포퓰리스트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정치인이 표를 싫어하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포퓰리스트와 일반적 정치인을 나누는 그 경계선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다시 말해 제도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행위와 그 제도가 보호하고자 했던 가치를 손상하는 데에 이르는 행위는 구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프린스턴대학의 얀베르터 뮬러 교수는 포퓰리스트를 판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대부분의 포퓰리스트는 반엘리트적이며 반다원적이다. 둘째, 오직 자신만이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의 엘리트 그룹을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적으로 규정하고, 이 엘리트에 반대되는 국민의 이익은 자신만이 대변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책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 따르면 대부분의 포퓰리스트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해치는 ‘개혁’을 주도하고, 또 ‘국익’에 반하는 보도를 삼가라고 하면서 언론을 압박한다. 본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포퓰리스트는 국민을 구분한다. 자신의 지지 세력만이 ‘진정한 국민’이며 국가의 지원은 이들에게만 가야 한다는 논리의 왜곡을 발신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년간 본인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계속해서 본인을 지지할 수밖에 없도록 미국을 양분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양분화된 유권자들의 결집력을 높여 투표장에 끌어내면 승리한다는 공식에 따른 것이다. 그 결과, 7400만표를 얻었다. 이는 앞으로 트럼프가 아니어도 트럼프와 같은 전략을 구사할 정치인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유권자의 몫이 된다. 민주주의는 유권자들이 지킬 의지를 갖추고 나서야만 지켜지는 제도임을 이번 미국 선거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