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핵 개발을 주도했던 과학자가 테러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면서 ‘엄중한 복수’를 다짐해 중동 지역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란 국영 IRNA통신은 27일(현지시간) 국방부 연구·혁신 기구 수장이자 핵 과학자인 모센 파크리자데가 수도 테헤란 인근 소도시 아브사르드에서 암살됐다고 보도했다. 이란 국방부는 성명을 내고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파크리자데가 탄 차량을 목표로 삼았다. 테러범들과 경호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뒤 파크리자데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다”며 “의료진이 그를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불행히도 끝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이란 언론들은 테러범들이 차 안에 있던 파크리자데에게 총을 쐈다고 보도했다. 앞서 파르스 통신은 아브사르드에서 차량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면서 “테러범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사망했다”는 목격담을 보도했다.
모하마드 바게리 이란군 참모총장은 테러 조직과 배후에 대한 ‘엄중한 복수’를 천명했다. 그는 파크리자데의 죽음이 “비통하고 중대한 타격”이라면서 “우리는 이번 일에 관계된 자들을 추적해 처벌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호세인 데흐건 이란 최고지도자 군사 수석보좌관은 “(가해자들을) 천둥처럼 내려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28일 발표한 성명에서 “다시 한 번 세계의 오만한 세력(global arrogance)과 그 용병인 시오니스트 정권의 사악한 손에 이 나라 아들의 피가 묻었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앞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국제사회가 이번 테러행위를 규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스라엘이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징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도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이란 핵 과학자들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직 이번 사건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이란이 2015년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에서 한 약속과 달리 농축우라늄 비축량을 증가시키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이번 암살로 역내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존 브레넌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이번 암살이 ‘범죄’이자 ‘대단히 무모한 행동’이라면서 “치명적 보복과 새로운 역내 갈등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지적했다. 다만 그는 “외국 정부가 암살을 승인하거나 수행했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암살 배후가 확인되지 않더라도, 파크리자데 죽음이 공공연하게 드러났던 이란-이스라엘 갈등을 격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파크리자데가 표적이 됐는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영국 BBC방송은 ‘이란 핵합의’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파기와 제재 복원, 이란의 합의사항 미이행 등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파크리자데의 죽음은 이란의 향후 모멘텀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일 수 있다고 짚었다. 또 이란 핵합의 복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이 내년 1월20일 취임하더라도 이번 암살로 인해 협상 과정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60세 정도로 추정되는 파크리자데는 이란의 가장 유명한 핵 과학자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이란이 진행한 핵무기 개발 계획인 ‘아마드 프로젝트’를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란 핵 프로그램이 중단된 뒤에도 이를 승계한 연구소를 맡아 아마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을 관리해왔다. 이스라엘이 2018년 이란 기밀문서를 입수했을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파크리자데를 이란의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책임자로 지목하며 “그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최초의 핵무기 개발에 기여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빗대 그를 ‘이란의 오펜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