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한 고기영 법무부 차관 후임 인선을 통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검찰총장 축출행보에 힘을 실어줬다. 그간 추·윤 갈등 와중에 침묵하던 문 대통령의 내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 조치로 해석된다. 전날 법원과 법무부 감찰위는 추 장관의 윤 총장 직무배제 조치 등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검찰 안팎에서도 추 장관의 윤 총장 찍어내기 행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추 장관 손을 들어준 셈이다. 다수 여론에 맞서는 이 같은 결정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출로 해석된다.
자칫 머뭇거리다가는 윤 총장의 존재감이 커지고, 검찰의 조직적 반발이 세를 얻어 레임덕(임기말 국정누수 현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참모들은 문 대통령이 신속한 결정을 내린 배경을 주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윤 총장과 검사들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추·윤 갈등이 문재인정부의 핵심 과제인 검찰개혁과 맞물려 있다는 점도 문 대통령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추·윤 갈등이 부각되면서 검찰총장 한 명의 진퇴가 마치 국정의 중대 사안처럼 비치면서 검찰개혁이란 큰 흐름이 실종됐다는 우려다. 문 대통령으로선 정권의 최대 역점 사안인 검찰개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의 ‘윤석열 검찰’을 그대로 안고 가기는 어렵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역풍을 불러올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주 갤럽 조사에서는 중도층에서 ‘정부견제’(57%)가 ‘정부지원’(34%)을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자세한 내용은 선관위 홈페이지 참조) 윤석열 압박 등 친문재인 지지층의 여론에 부응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그 배경인 것으로 분석됐다. 앞으로 ‘법무부 징계위의 윤 총장 해임 의결→ 문 대통령 재가’ 수순이 현실화하면 문 대통령은 그 후폭풍을 전면에서 맞아야 한다.
윤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다가 내쫓긴 모양새가 연출되면서 존재감이 커질 수 있다. 윤 총장은 실제로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건에서 문 대통령과 여권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정치적인 존재감이 급상승했다. 따라서 윤 총장이 총장자리에서 밀려난다면 더 큰 혼란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이날 이 차관 내정자가 법무부 징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대신 위원으로만 참여하는 것도 이 같은 후폭풍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윤 총장 해임으로 이 사태가 조기 진화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오는 4일 법무부 징계위원회에서 윤 총장 해임을 결정하고 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더라도 윤 총장이 그대로 물러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서다. 불복 소송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소송 과정 하나하나가 국민들에게 생중계되면서 또다시 윤 총장 사태가 모든 국정을 뒤덮을 공산이 크다. 청와대와 여권이 우려하는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다.
여권 일각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여권이 윤 총장이란 기관차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추·윤 갈등을 정치적 공학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정치 갈등이 심화하고, 그 와중에 민생 정책이 방기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올해 정기국회에서도 여권은 문재인정부의 국정과제라는 꼬리표가 달린 논란 법안들을 야당의 반대에도 밀어붙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윤 총장에 대한 징계 수순을 강행하는 것은 “향후 사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일방적 독주는 결국 후폭풍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현재의 국정 혼란 상태는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방치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이날 문 대통령의 차관 내정에 대해 “법원의 판단이나 법무부 감찰위원회의 판단 자체를 무시하고 가겠다는 것”이라며 “지금은 책임을 피할지 몰라도 잘못하면 향후 사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또 민주당을 향해서도 “입법부가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해야 건강한 정부를 만드는데 여당은 병 드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국회의 기본 기능을 망각한 것”이라며 “결국 박근혜정부가 무너지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밟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조건 대통령 눈치를 보며 옹호하다가 박 전 대통령이 무너졌다. 물론 대통령 책임이 제일 크지만 그걸 제대로 견제하고 통제할 힘이 여권에 없어서 더 위험하게 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계명대 김관옥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추 장관이 전략을 잘못 짜고 어설프게 접근을 한 것 같다. 윤 총장을 끌어내리는 데 너무 집중해서 사실상 검찰개혁이란 본질을 흐렸다”면서 “이 같은 방식이 결국 절차적 하자를 만들어내고 여기서 모든 패착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박현준·곽은산 기자 hjun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