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개봉한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 많았다. 이 같은 시나리오를 써보리라 작심한 청춘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화려한 색감에 매료되어 ‘미술감독’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꾸는 이들이 생겨났다. 글 좀 쓴다는 누리꾼들은 저마다 감상평을 띄우기에 바빴다.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이야기다. 화양연화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뜻한다. 오는 24일 화양연화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해 1년 동안 코로나19에 지친 심신 달래기에 나선다. 크리스마스 선물인 셈이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바탕에 딱딱한 고딕체형 흰색 한자가 적힌 자막이다. 배경은 1962년 홍콩.
이사할 집을 보러온 첸 부인(장만옥)의 눈길이 바쁘게 집 안 이곳저곳 구석까지 훑는다. 20년 전 개봉 당시 보았을 땐 왜 몰랐을까. 매우 짧게 지나가는 장면인데도 장만옥의 사실적인 눈연기가 단번에 객석의 마음을 앗아간다.
같은 날 다세대주택으로 이사 와 나란히 이웃이 된 첸 부인과 차우(양조위). 이삿짐이 뒤바뀌어 좁은 복도에서 빈번히 마주쳤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이 불륜관계라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둘은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복도에선 인사말과 함께 그럴싸한 변명부터 건넨다. “남편이 해외출장 중이라서…” “장모님이 아프셔서 들여다보러 갔어요.”
두 사람은 감정을 숨긴 채 꾸준히 ‘연기’하면서 자학한다.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선 불편할 듯한데, 무리 없이 공감하게 만드는 게 이 영화가 지닌 ‘마력’이자 ‘매력’이다.
철저하게 절제된 화면은 시종일관 안정적이다. 그래서 불쑥 등장하는 슬로모션 장면들이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카메라가 국수통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장만옥을 어깨 아래부터 담아내며 따라가기 시작할 때 주제가가 터져나오고, 이미 숨이 막혀 버린 관객들은 이때부터 무서운 속도로 화면에 빨려들고 만다.
“둘은 어떻게 (불륜을) 시작한 걸까요?”
배우자들 관계의 처음이 궁금해진 첸 부인과 차우는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어가고, 서로의 배우자들을 흉내내 보며 그들의 시작을 추론해 본다.
“당신이 주문해요. 그쪽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요.”
“당신 남편은 뭘 좋아하나요?”
둘은 그렇게 식사를 시작한다. 바람 피우는 배우자들이 무엇을 함께 먹었을까 떠올려보면서.
“입에 맞아요?”
“(당신) 아내가 매운 걸 좋아하나 봐요.”
이들의 식사는 묘하게 ‘데이트’가 된다.
그러나 반듯하게 빗어넘긴 머리와 목까지 야무지게 여민 치파오 차림의 두 사람은 설령 좋아하더라도 쉽사리 유혹의 선을 넘지 않는 도덕적 캐릭터다. 첸 부인이 말한다. “우린 그들하고 다르니까요.” 둘은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다.
감정이 깊어질까봐 나름 경계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침내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비 내리던 날. 사랑을 깨달은 차오가 털어놓는다. “(배우자들) 두 사람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많은 일들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 당신 남편이 언제 오나 걱정되고, 아예 안 돌아오길 바랐어요. 참 못 됐죠?”
이쯤 되면 관객은 두 사람이 복수 같은 사랑이라도 하길 바라게 된다. 어느새 둘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마치 절절한 나의 사랑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남자는 떠난다. 여자도 뒤늦게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앙코르와트 사원 어느 벽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봉인하는 차우의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면 왕가위 감독의 탐미적인 미장센과 특유의 감각적인 연출에 흠뻑 젖어들고 만다.
장만옥은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스물한 벌이나 갈아입고 나온다. 문양과 색깔이 모두 다른 치파오는 신기하게도 장만옥의 몸에 착착 달라붙으며 극중 첸 부인의 내면상태와 심정변화를 스크린 가득 풀어놓는다. 유혹의 초록색은 불륜을 상징한다. 흰색은 순수, 붉은색은 사랑이다. 둘이서 함께 무협소설을 쓰던 호텔은 전체가 붉은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다. 흰색 치파오 위에 붉은 코트를 걸치고 호텔을 찾은 장만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종이로 제작된 치파오도 여러 벌이다. 옷감으로 만들어진 그것과는 다른 질감을 살려 배우의 감정이 수월하게 드러나도록 거들었다. 어떤 치파오를 입혔을 때 장만옥의 느낌이 제대로 표출되는지를 훤히 알고 있던 장숙편 미술감독의 예술혼이 빛나는 대목이다.
음악 또한 색채 못지않게 큰 몫을 해낸다. 느린 이미지의 향연을 뒷받침하는 것은 냇 킹 콜의 감미로운 재즈곡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다. 몽환적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고혹적인 이미지는 화양연화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치파오 차림의 장만옥 이미지는 제59회 칸국제영화제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제53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유수 영화제에서 97개 부문 수상이나 노미네이트를 기록하며 명작 반열에 올랐다. BBC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위’에 올라 시대를 초월한 걸작임을 입증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