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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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 오를 수 있나… 희망마저 두동강 났다 [연중기획-끊어진 계층이동 사다리]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내 집 마련까지 결국 ‘엄빠 찬스’
한국 부모 교육열 전 세계적으로 유명
자식에 좋은 대학 간판 달아주려 애써
더 나은 계층을 물려주기 위한 돌파구

억대 비용 받고 명문대 입학 책임지는
드라마 속 ‘입시코디’ 공공연한 비밀
‘부모의 재력=명문대’ 공식도 굳어져

SKY의대 신입생 70% 상위 계층 해당
25개 로스쿨 신입생 절반도 고소득층
더 이상 ‘계층이동 사다리’ 역할 못 해

서울 신혼부부 ‘영끌’해도 전세 못 얻어
대학 졸업 후에도 ‘부모 찬스’는 이어져
‘금수저’ ‘흙수저’ 양극화 갈수록 뚜렷
#. 직장인 김모(33)씨는 대학 동기 모임을 나갈 때마다 씁쓸하다.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동기 몇몇의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김씨 역시 학부 졸업 후 진학을 꿈꿨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취업해야 했다. 김씨는 “변호사 친구들을 보면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다. 연봉 얘기를 들어보면 더욱 심해진다. 나보다 3년 이상 늦게 사회 진출을 했지만, 유명 로펌에 입사한 친구들은 초봉부터 억대를 받고 있더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과의 격차는 좁힐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동기 모임을 나가는 걸 주저하게 된다”고 말했다.

 

로스쿨은 사법고시의 폐쇄적 기수문화, 몇몇 특정 대학에 합격자가 몰려 있는 것 등을 바로잡고자 하는 취지로 2009년 도입됐다. 2017년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이제는 법조인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로스쿨 진학이다. 도입 때부터 ‘돈스쿨’, ‘귀족스쿨’ 논란을 일으켰던 로스쿨은 여전히 그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비판이 큰 지점은 비싼 학비다. 3년, 6학기로 이뤄진 로스쿨을 졸업하기 위해선 평균 6000만원이 들어간다. 가장 저렴한 로스쿨도 3000만원이다. 애초에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로스쿨 진학을 결정하기 어렵고, 고소득층 자녀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라 불리는 이유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의대·로스쿨 신입생 소득분위별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에 따르면 전국 25개 로스쿨 신입생의 51.4%가 고소득층으로 분류되는 소득 9·10구간으로 조사됐다. 2020년 기준 소득 9구간의 월소득 인정액은 월 949만8348원 이상, 10구간은 월 1424만7522원 이상이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이른바 ‘SKY 대학’의 로스쿨로 좁히면 58.3%로 더 올라간다. 전국 대학 신입생의 평균 고소득층의 비율이 24.5%라는 것을 감안하면 로스쿨이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되기는커녕 고소득층의 부 대물림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 현실은…

 

대한민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1945년 해방 이후 빠르게 산업화와 근대화를 겪은 한국은 양반-상놈의 신분구조가 한순간에 타파됐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가 자신보다 더 나은 계층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한 수단이 바로 교육이었다.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에겐 더 나은 교육과 더 나은 간판을 달아주기 위해 힘쓰는 게 한국의 부모들이다. 대학을 흔히 ‘우골탑’이라 부르는 것도 농가에서 가장 큰 재산인 소를 팔아서 자식을 대학 보낸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공정성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민심의 ‘역린’이 됐다. 지난 박근혜정권을 무너뜨린 ‘최순실 게이트’와 문재인정권의 공고했던 지지율에 가장 큰 균열을 냈던 ‘조국 사태’의 시작이 바로 자녀 교육 문제였다. 2018년 방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것도 교육, 그리고 입시가 공정할 것이란 일종의 믿음 혹은 성역을 철저히 깨부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스카이캐슬’이 드라마 특유의 과장이 있긴 해도, 연 1억원이 넘는 비용을 받고 명문대 입학을 책임지는 ‘입시코디’가 있다는 것은 ‘가진 자들의 리그’에선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는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대학 간판, 나아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른 딸을 둔 회사원 장모(49)씨는 “스카이캐슬을 보고 가장 충격을 받은 점은 내가 딸에겐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사교육을 고소득층은 척척 해줄 수 있다는 일종의 무력감이었다”면서 “딸이 공부로 힘들어할 때 족집게 과외는 시켜주지 못할망정 ‘공부란 건 결국 엉덩이를 누가 의자가 오래 붙이고 있느냐’라고 말했던 내 충고가 딸에겐 그저 현실감 부족한 아빠의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을까 싶어 슬프다”라고 말했다.

 

로스쿨뿐만 아니라 명문대 진학에도 부모의 부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통계도 수두룩하다. 정찬민 국민의힘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학기 SKY대학 신입생 중 장학금 신청자를 대상으로 소득구간을 나누자 9·10구간이 55.1%를 차지했다. 2017년 SKY 대학의 고소득층 비율은 41.1%에 그쳤지만 2018년 51.4%, 2019년 53.3%, 2020년 55.1%로 해마다 상승세다.

 

특히 SKY대학의 의대 신입생의 경우 10명 중 무려 7명 이상이 고소득층으로 분류됐다. 올해 1학기 이들 대학 의대 신입생 중 9·10구간 비율은 74.1%로 2017년 54.1%에 비해 20%포인트나 급증했다. 서울대 의대는 2017년 45.8%였던 고소득층 비율이 올해 84.5%까지 올랐다. 3년 새 고소득층 비율이 무려 38.7%포인트나 폭증한 것이다.

 

‘부모 찬스’는 대학 진학 이후에도 계속된다. 최근 교육부 종합감사를 통해 대학 사회의 이런 어두운 그늘이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 7월 발표한 연세대학교와 학교법인 연세대 종합감사 결과에 따르면 연세대 교수 1명은 2017년 2학기 회계 관련 강의를 담당하면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딸에게 수강을 권유하고, 딸에게 A+ 학점을 줬다. 연세대 대학원 입학전형 서류심사에서는 평가위원 교수 6명이 2016년 이모 전 국제캠퍼스 부총장의 딸 A씨를 경영학과 일반대학원에 합격시키고자 주임교수와 짜고 지원자들의 구술시험 점수를 조작한 것으로 밝혀져 공분을 샀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과거엔 재벌이나 최고 부유층만 계층을 세습했다면, 이젠 중산층도 세습하는 사회가 됐다. 저소득층이나 서민층이 교육이나 새로운 직업을 통해 계층을 상승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회가 됐다”면서 “부모 소득 격차에 따라 교육 수준이 달라지지 않도록 입시제도 개편 등의 공교육 개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진=뉴스1

◆대학 졸업 후엔? 부동산도 ‘부모 찬스’

 

결혼을 준비 중인 직장인 이모(34)씨는 최근 서울 내 전셋집을 알아보다 예비신부와 다퉜다. 날로 치솟는 서울 아파트값을 한탄하다 예비신부가 대학 동창 얘기를 꺼낸 터였다. “걔 남편은 부모가 좀 사는지, 금호동에 아파트를 샀는데 그게 몇 년 새 두 배로 뛰었다네.” 그 얘기에 악의가 없는 줄 알면서도, 이씨는 마음이 상해 “우리 집은 거지라서 미안하네” 하고 빈정대면서 말다툼이 시작됐다.

 

이씨와 예비신부는 모두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했고, 현재는 유명 대기업을 다니고 있다. 둘 사이에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소위 ‘영끌’(영혼까지 자금을 끌어모음)하면 서울에 20평대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쉬이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알아보니 아무리 둘이서 대기업 월급을 받아도, 자력으로는 서울 아파트 전세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씨는 “이전까지는 내 여건에 만족하는 편이었는데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내가 노력만으로 올라설 수 없는 ‘벽’ 같은 걸 느끼게 됐다”며 “금호동에 집을 샀다는 그 친구는 내 월급으로는 꿈도 못 꾸는 돈을 지금 이 시간에도 벌고 있는 거 아니냐”며 한탄했다.

 

특히 문재인정권 들어 아파트값이 폭등하면서 30대 사이에서 부동산 양극화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이는 곧 부동산이 끊어진 사다리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부자 부모를 둔 ‘금수저’들은 부모로부터 증여를 받아 서울의 아파트에 입성해 출발부터 수십억원대 자산가로 시작한다. ‘흙수저’들은 시작부터 은행 대출을 최대한도로 끼고도 서울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 김 교수는 “대학 간판이 직업의 귀천, 근로소득 수준의 고저를 결정한다면, 사회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세습을 만드는 효과는 근로소득보다는 부동산이나 불로소득이 더 크다”고 말했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숨만 쉬고 살며 모아도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15.6년이 걸린다는 분석도 있다. KB국민은행 부동산 플랫폼 KB부동산 ‘리브온’(Liiv ON)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서울 3분위 가구(2인이상·도시가구)의 소득 대비 주택가격(PIR)은 15.6으로 2008년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았다. PIR은 주택가격을 가구 소득으로 나눈 값으로, 가구 전체가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을 경우 주택을 구입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뜻한다.

 

부동산 구입이 이렇게 힘들다 보니 2030 젊은 세대들은 결혼 자체를 잘 하려 하지 않고,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딩크족’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신혼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 5년차 부부 가운데 자녀가 없는 부부는 18.3%였다.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15년엔 12.9%였으나 2016년 13.7%, 2017년 14.9%, 2018년 16.8%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결혼한 김모(34)씨는 “결혼 전부터 아내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합의했다. 내 처지로는 아이를 낳더라도, 그 아이에게 우리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과거엔 좋은 학교 가서 좋은 직장 잡아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가정도 꾸릴 수 있었지만, 부의 불평등이 워낙 심각해진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부모 도움 없이는 개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해 살아가기 너무 힘들어졌다”면서 “부동산 문제가 이를 특히나 키웠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거의 끊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로 취업난은 더욱 심각해져서 젊은 층의 직업을 통한 계층 상승이나 제도권 진입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남정훈·유지혜 기자 ch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