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변 상공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동아시아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강대국들의 움직임도 여전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나라 영공방어의 최일선인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군용기를 투입, 한반도 주변 제공권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도 전략폭격기를 일본 상공에 띄우는 등 동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갈등이 첨예화되는 모양새다.
◆연합훈련 띄우는 중·러… 미국 “역내 불안정 시도 저지”
지난달 22일. 합동참모본부와 공군 중앙방공통제소(MCRC)는 비상이 걸렸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이 남해와 동해 방공식별구역에 잇따라 진입하면서다. 공군 전투기들이 급히 대응 출격에 나서는 등 군 당국은 이날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날 오전 8시 중국 H-6 전략폭격기 2대가 이어도 서쪽에서 방공식별구역에 진입, 울릉도 동쪽 일대를 거쳐 이탈했다. 수호이-35 전투기와 Tu-95 전략폭격기, A-50 조기경보통제기 등 러시아 군용기 15대도 동해 방면으로 진입했다. 이 가운데 2대는 독도 동쪽으로 벗어났다가 재진입해 독도 동북쪽으로 이탈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의 ‘앞마당’인 방공식별구역을 하루 종일 휘젓고 다닌 셈이다.
양국은 이번 비행을 ‘아시아태평양 지역 제2차 연합 공중 전략 훈련’으로 소개하며 외교·군사 공조를 과시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전화통화를 갖고 “미국이 일방적인 제재의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다”면서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국제관계 준칙 아래 세계의 공평과 정의를 지키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미국의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저지하고 중·러 양국의 공동이익을 지킬 것”이라고 화답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지난달 24일 논평에서 “중·러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포괄적인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며 양국 간 연합훈련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훈련 영상을 공개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동맹국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를 압박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에서 무력시위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흔들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제기된 이유다.
미국은 즉각 반발했다. 미 국무부는 같은 날 논평을 통해 “상황을 주시하면서 역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도를 막겠다”고 경고했다. 앞서 23일에는 미 공군 B-1B 전략폭격기 2대가 남중국해를 비행했으며, 31일에는 미 해군 구축함 2척이 대만해협을 항해했다. 미국은 괌 앤더슨 기지와 주일 미군기지에 B-1B와 F-22 스텔스 전투기를 배치하고 일본과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등 해군과 공군력을 투입, 중국·러시아 견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힘의 공백’ 노린 각축전… 더 심해질 수도
방공식별구역 무력화에 나선 중국·러시아의 연합훈련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반도 일대가 ‘힘의 공백’ 상태라는 점과 무관치 않다고 지적한다.
냉전 시절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한반도 인근 바다와 하늘은 미국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미 해군 핵추진항공모함은 정기적으로 한국의 항구를 방문하고, 동해와 남해 일대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B-1B와 B-52 전략폭격기도 한반도 인근을 비행하며 무력시위를 벌였다.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 무력도발을 지속하는 북한에 경고를 보내기 위한 조치였으나, 중국·러시아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효과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남오세티야 전쟁(2008년), 우크라이나 개입(2014년)을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리비아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도 군사적인 움직임을 지속했다. 중국도 남중국해 섬들을 요새화하는 한편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미국과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양국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기조는 2017년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단행하자 미국은 핵항모 3척을 동해에 투입하고 B-1B가 북한 인근까지 북상하는 등 초강경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전환되면서 미 전략폭격기와 핵항모의 한반도 전개는 중단됐다. 강력한 전략자산을 앞세워 동북아를 장악했던 미국의 힘이 일시적이나마 사라지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앞마당’격인 한반도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전략폭격기 연합훈련은 이 같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정보 소식통은 “국제정치는 ‘힘의 공백’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며 “북한 변수를 고려한 한·미의 행보가 중국·러시아의 군사행동 확대라는 나비효과를 불러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태는 올해도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 남해와 동해 방공식별구역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의 잦은 출현으로 방공식별구역이 실효성을 잃으면 영공 방어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
2019년 7월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해 우리 공군 전투기가 경고사격을 한 사건처럼 갈등의 불똥이 우리 측으로 날아들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군사적 긴장이 급속히 고조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군 관계자는 “군은 확고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정부는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변국과의 갈등 관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