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판매나 제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옥시레킷벤키저와 SK케미칼, 애경산업의 희비가 엇갈렸다. 지난해 10월 기준 사망자 등 2700여명의 피해자가 나온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옥시 측은 2018년 신현우 전 대표가 징역 6년형을 확정받았다. 반면, 800여명의 피해자가 나온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애경산업 전 대표는 1심이긴 하지만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이 엇갈린 판단을 한 건 SK케미칼·애경산업과 옥시 제품의 주성분이 달라서다. 재판부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제품의 주성분이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인과관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봤다. 이들 회사 제품을 쓴 피해자와 유족들은 “부당한 판결”이라며 반발했고, 검찰도 즉시 항소 입장을 밝혔다.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유영근)는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이마트 관계자 등 13명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고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앞서 검찰은 홍 전 대표와 안 전 대표에게 각각 금고 5년을 구형한 바 있다.
재판부는 SK케미칼의 ‘OK·SK 가습기메이트’, 애경산업의 ‘홈크리닉 가습기메이트’ 주성분인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 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이 폐질환이나 천식 등을 유발한다는 인과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 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CMIT·MIT가 천식을 악화할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하고, 가습기 살균제를 통해 CMIT·MIT가 사람의 폐에 도달한다는 것이 확인돼야 한다”며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해봤을 때 CMIT·MIT가 폐질환 또는 천식을 유발했다고 입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런 결론은 환경부가 CMIT·MIT 함유 제품 이용자들의 피해를 공식 인정해온 것과 상반된다. 재판부는 “모든 시험과 연구 결과를 종합한 환경부의 종합보고서는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한 기존 연구에 대해 추정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는 일종의 의견서에 그친다”며 “이 같은 추정에 기초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다만 무죄로 선고할 수밖에 없는 데 대한 괴로움을 털어놨다. 재판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한 사회적 참사다. 바라보는 심정이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없다”며 “추가 연구 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이번 재판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재판부 입장에서는 현재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사법의 근본 범위 내에서 판단했다”고 밝혔다.
유죄 여부 판단의 핵심이었던 가습기메이트 성분(CMIT·MIT)은 2018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 성분과 다르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의 기초가 되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은 질병관리본부가 2014년 발간한 가습기피해백서에서 유해성이 인정된 바 있다.
재판부는 뒤이어 열린 재판에서도 PHMG 제조·판매에 관여해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 전직 직원 4명에 대해 “판매 경위 등에 비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과 상해라는 결과가 발생하는 데 본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판결에 수긍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조모씨는 “해당 제품을 쓰고 사망에 이르거나 지금까지 투병 중인 우리 피해자들은 과연 무슨 제품을 어떻게 썼다는 것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환경부가 지난해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 피해를 인정한 피해자는 총 4114명이다.
검찰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1심 법원은 동물 실험 결과와 인체 피해의 차이점을 간과하고, 전문가들이 엄격한 절차를 거쳐 심사한 가습기살균제 피해 판정 결과를 부정함으로써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한 기업 책임자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비판하면서 이날 판결들에 대해 모두 항소하기로 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