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철도원 삼대’ 같은 작품을 서너 권정도 쓸 거요, 그 정도면 열심히 일한 겁니다. 근데 내가 세워놓은 계획이 10가지도 넘는데, 이거 언제 다 쓰고 죽지.” 9년 만에 얼굴을 다시 맞댔지만, 구수한 입담이나 담대한 포부 모두 여전했다. 정정해 보이는 게 좋았다. 하긴 허리가 조금 굽어보이긴 했다. 이 말을 했더니, 그는 허리를 곧추 세웠다. “지금 운동을 더해야 합니다. 제 꿈이 조금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한 서너 권은 더 써야 합니다. 88세까지 쓰려고 해요.” 일본이나 북유럽에선 많은 이들이 ‘100세 현역시대’를 겨냥해 뛰고 있다고 전하자, 목소리가 더 높아갔다.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 선생은 96세인데,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작가는 은퇴라는 게 없어요. 죽을 때 펜을 잡고 죽어야지요. 그게 직업의식이고, 장인이지.”
소설가 황석영은 코로나19에도 여여(如如)했다. 아니 여여한 정도가 아니라 ‘만년문학’을 제대로 펼쳐 보이겠다며 문학정신을 벼리고 있었다. 한파도, 눈도 펄펄 끓는 그의 문학 열정을 식힐 수 없는 듯했다. 그의 작품 역시 최근 미국과 일본, 영국 등 해외 각국에서 속속 번역 출간중이다. 최근 일본에서 자전 ‘수인’이 번역 출간된 것을 핑계로 그를 만나러 익산으로 내려갔다.
새벽까지 내린 눈이 삼남의 산하를 하얗게 덮은 구랍 30일, 익산 유스호스텔에서 황석영을 만났다. 치과치료를 받느라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 ‘비껴서서 남 얘기인 듯하는’ 모습 역시 여전했다. 그의 말은 존칭과 반말 사이를 자주 오갔다. 삶과 문학에서 새 길을 모색하려는 모습도 언뜻언뜻 내비쳤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금까지 일생을 ‘전사’로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현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느냐, 전사에서 현자로 가야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듭디다.”
―코로나19를 견딜만한가.
“젊은 사람들이야 생활 절반 정도가 모여서 놀고 마시고 카페가고 하는 것일 텐데, 불편하겠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작가라는 게 방구석에서 틀어박혀서 일하고,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하니까. 마스크 쓰고 다니는 것은 불편하더라. 사람들이 인상과 표정을 다 잃어버렸어요.”
―익산 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다.
“2017년 자전 ‘수인’을 냈지요. 사실 쓰기 싫었는데, 출판사와 얽혀 어렵게 쓰게 됐어요. 그런데 자전이 나오고 나니 묘하더라. 자전까지 쓰고 나이도 있으니 이제 그만 써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허전하면서 장기나 내장이 쏙 빠져나온 것 같았죠. ‘원로 작가가 가는 길이라는 게 동어반복해온 습성이나 작품 경향, 매너리즘을 뚫지 못하면 거기에서 끝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들이야 완성이라고 하겠지만, 작가가 완성이 어디 있어요, 죽을 때까지 써야죠. 그래서 ‘백척간두에서 더 나가야겠다, 수십 년간 얘기만 해오고 못쓴 ‘철도원 삼대’를 달라진 환경에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8년 5월, 트렁크 2개를 싸서 익산으로 내려왔지요.”
자전 출간은 그의 만년문학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책은 소설가를 꿈꾸는 그를 말리던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건 자기 팔자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란다.”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내가 우여곡절이 많은 게 그것 때문이 아니냐”고 웃었지만, 자전은 “젊은 날, 당신의 고집을 꺾었던 아들이 다 늙어 어머니 영전에” 바치는 책이었다. 수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 ‘에필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수인’이 최근 일본에서 번역 출간됐는데.
“일본에선 이미 (지난해) 12월10일쯤 번역 출간됐지요. 프랑스어판은 1월 유명 출판사 ‘필리 피키에(Editions Philippe Picquier)’에서 나올 예정이고요. 영어판은 출판사 버소(Verso Books)가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 출간할 예정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8월로 연기됐어요. 거의 동시에 광주항쟁을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역시 버소에서 나오고요.”
―오래 전부터 ‘만년문학’을 주창했다(9년 전 만났을 때도, 그는 만년문학을 얘기했었다).
“만년문학은 실천을 못하고 입으로만 떠든 것 같아요. 자전 ‘수인’이 (만년문학의) 말뚝을 박은 것이고, 대문을 연 것이 ‘철도원 삼대’입니다. 몇 권을 더 쓸 거예요.”
―‘철도원 삼대’는 사실 오래 전부터 해온 이야기인데.
“‘철도원 삼대’는 이렇게 굴리고 저렇게 굴리고 해서 나왔는데, 생각한 것과 다르게 나오더라. 딱딱하고 지루한 소설이 될 소재였지만, 스토리텔링이 매끈하고 민담 식으로 잘 풀렸어요. 소설을 쓸 때 아주 즐겁게 썼지요. ‘철도원 삼대’를 세상에 던져놓고 나니, 얼마나 후련한지 몰라요. ‘나의 시간과 인생이 저런 식으로 존재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작품을 쓰고 나서 용기가 났어요. ‘해볼 만하다, 더 해야겠다’고요.”
장편 ‘철도원 삼대’는 1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요즘 책을 읽지 않는 현상을 감안하면 옛날의 100만부 수준. “옛날 같으면 원로가 썼다고 떠들썩했을 텐데, 코로나19 때문에 흐지부지 돼버렸어요. 나는 죽는 날까지 펜을 붙들고 죽으려고 해요.”
자신의 최고 작품을 하나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철도원 삼대’를 꼽았다. 그런데 이유가 황석영답다. “옛날 작품은 가물가물해서 잘 모르겠어요. 나는 늘 최근에 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철도원 삼대’가 최고지. 다음 작품을 쓰면 그 작품이 최고작이 되죠(웃음).”
바야흐로 만년문학의 대지에 선 황석영 문학 여정은 1960년 4월 진동하는 서울의 거리에서 시작됐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좋아했던 고교 동창 안종길이 4∙19혁명 당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총탄에 숨졌다. 친구의 피가 함께 있던 그의 교복을 적셨고, 그는 친구의 유고시집 ‘봄, 밤, 별’을 펴내며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황석영은 이후 시대와 문학 사이를 분주히 왕래했고, ‘시대의 수인’과 ‘문학의 수인’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남도 공사판을 전전했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1970년대엔 땅끝 해남으로 내려가 문화운동의 춤판을 벌였다. 그 사이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과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塔)’이 차례로 당선돼 등단한 그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의 삶을 핍진하게 그리며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격찬을 받았다. 이 시기 대표작으론 단편 ‘객지’, ‘삼포가는 길’, 중편 ‘한씨 연대기’, 대하소설 ‘장길산’ 등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했고 급기야 1989년 금단의 땅 북한에 들어갔다가 망명과 구속, 5년 복역이라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시대의 격류에 휩쓸린 그는 1984년 7월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를 끝으로 10년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가야 할 ‘집’은 문학이었다. 1998년 감옥에서 나온 뒤 다시 글을 쓰며 후반기 문학을 열었다.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해질 무렵’ 등이 그것이다.
―왜 대하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건가.
“글쎄, 지금 후회되는 바가 있어요. 청년 작가 시절 ‘지향하는 문학과 개인적인 삶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사실 많은 작가들의 경우 문학과 삶이 상당히 떨어져 있고,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나는 ‘진정한 작가는 (문학과 삶이) 같이 어울려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노력한 건 아닌데, 살다보니 삶도 소설처럼 같이 갔어요.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삶은 뒤죽박죽, 우여곡절이 돼버린 거지요. 지금 와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지나고 보고 문학과 작품은 남는 것이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이렇게 살았겠느냐’고 가정을 전제로 물었다. 그의 대답, 재미있다.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갯소리이지만, 농담에 부응해 애기를 하자면, 다시 태어나면 딴 것 할 거야. 작가, 그거 다시는 안 해. 제일 재미없는 거야.”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살면서 후회한 적은 없느냐(그는 언젠가 ‘가족’과 ‘재능의 과신’을 회한으로 꼽았다).
“가족이 늘 가슴에 얹혀 있어요. 특히 애들에게 해준 것도 없이 아버지 이름의 무게만 줘서 미안합니다. 어디선가 아버지 목소리는 들리는데도, 다른 아버지처럼 제대로 못해줬다는 게 미안하죠.(문학의 제단에 아버지를 빼앗긴 것 아닌가) 역사적으로 평화적인 시대나 사회가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어요.”
―최근까지 꾸준하게 쓰는 비결은.
“다른 취미가 별로 없고, 옛날에는 술이라도 먹었는데, 요새는 술도 못합니다(정말 술을 하지 않느냐) 조금씩은 한다. 주야장창 못 먹는다는 의미다(웃음). 글 쓰지 않고 심심해서 뭐하느냐. 산책을 나가면 생각하고, 돌아서 집에 오면 책 보고 글 쓰고, 그것이 생활의 전부입니다.”
―원로나 거장 반열에 올랐음에도 작품 내용과 양식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시대 트렌드에 맞춰가려고 하는 것 같아 보기 좋다(작품 ‘개밥바라기별’은 블로그 연재를 잘 활용한 경우로 평가받았고, 2015년 출간된 ‘해질 무렵’은 이미지 전달 위주의 경장편 형식을 택해 현대인의 생활리듬에 맞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술가나 작가가 멈추거나 부패한다는 건 자기 세계에 안주하고, 표현이나 방법을 동어반복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현실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접점을 찾아가야 해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현실과 작품이) 둘로 갈라지거나 서로 잊어버립니다. 나는 현실과 마찰도 하고 충돌도 하고, 불화하기도 친화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어요. 형식은 새로운 양식도 취하지만 전통적인 양식, 무속에서도 가져오고 판소리 양식에서 가져오고 민담 양식에서 가져오기도 해요. 요즘에는 민담에 대해서 깊이 감탄합니다. 최고의 양식이에요. 굳이 얘기를 붙이자면 민담 리얼리즘이라고 할까요. 말하자면 ‘구라’라는 얘기이고, 소설은 구라라는 것입니다(웃음).”
―오에 겐자부로 등 많은 이들이 작품을 격찬했는데.
“돈도 많이 벌어봤지만, 나는 소유하고 누린 적이 없어요. 어느 점쟁이가 그러더라. ‘앞으로 물이 지나가니까 죽을 때까지 물을 떠먹을 수 있는데, 저수지가 없다더라’(웃음). 작가에겐 자유가 이거야(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디에도 억압당하거나 구속되거나 지배받거나 이래라저래라 받거나 눈치 보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작가는 결국 혼자 가야 하지요.”
참고로, 오에는 오래 전 앞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으로 오르한 파묵, 모옌과 함께 그를 꼽았다. 두 사람은 상을 받았고, 이제 그만 남았다. 오에는 황석영의 ‘손님’을 겨냥해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유한 작가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격찬했다. 소설가 이문열 역시 “우리 중에서 다양성이나 기교의 화려함이나 독특한 안목, 모든 면에서 우뚝하다”고 호평한 바 있다.
―글 쓸 때 습관이나 징크스 같은 게 있는지.
“가장 큰 약점은 글을 쓸 때 줄담배를 피우는 것입니다. 젊을 때부터 글을 쓸 때는 담배를 물고해요.(얼마나 피우나) 하루 2, 3갑 정도. ‘철도원 삼대’를 쓸 때도 2갑 이상 피웠어요. 야간작업하는 것도 고쳐야 합니다. 오늘처럼, 오전에 찾아오는 건 큰 실례요(웃음). 보통 오후 2, 3시에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활동하거나 산책하고 저녁엔 친구들도 불러 고기도 먹고 소주도 한잔 합니다. 저녁 10시쯤 집으로 들어와 책도 들여다보고 미적미적하다가 밤 12시쯤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죠. 밤 도깨비로, 완전히 거꾸로 살아요.”
이 대목에서 그는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를 소환했다. 황석영에 따르면, 발자크는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글을 썼고 그의 하인이 다음날 아침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욕물 데우기’였다. “거기에 푹 담그고 릴렉스한다, 오후에 단장하고….”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영등동 갈비탕 집까지 7, 800미터 정도를 함께 걸어갔다. 농로 한 가운데에서 그는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바람이 셌다. 나는 그의 뒤에 서서 바람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 끝에 성공하자, 그는 길게 한 숨을 빨았다. 담뱃불이 벌겠다. 김훈이나 이문열, 박석무 등등을 얘기하며 다시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논에는 아직 눈이 흩뿌려져 있었다.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벌써 문학으로 달떠 있었다. “새 작품을 이미 시작했어요. 제목은 ‘별찌에게’. 별찌의 별똥별의 별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인데, 번역하면 ‘디어 별찌’ 정도 되겠지. 만년의 노인이 암자 옆에 있던 숲의 추억을 쓰는데, 늦여름에서 초가을 넘어가는 그때 어느 숲의 얘기예요.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닌, 시 플러스 소설 형식의 ‘시설(詩說)’을 써서 새 장르를 개척해 보겠어요.”
‘시설’이라는 장르를 설명할 땐 문단사의 한 단층으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세계 명작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옛날 이문구(작고)와 김지하와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 술을 먹는데, 김지하가 ‘‘장길산’을 왜 그렇게 길게 주저리주저리 쓰느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는 ‘아니, 형은 똥을 누러 가면서 쓰는 것을 가지고 무슨 쓴다고 그래’라고 말했지. 결국 소설과 시 둘을 합치자고 해서 김지하가 대설(大說) ‘남’을 냈지. 예를 들기 힘들어서 드는 예지만, ‘어린 왕자’처럼 어른과 아이들이 같이 읽는 책으로, 동화인지, 성인들을 위한 철학 에세이인지, 그런 양식이 좋겠더라.”
“이건 중간에 쉬어가는 참”이라고도 했다. 차기작을 설명하는 그의 말은 점점 빨라지고 눈은 반짝거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 20세기와 21세기, 성장과 몰락, 미륵사상과 인드라넷, 생물학, 점성술, 천문학, 천체물리학, 불교생태학 등등. 키워드만 정리하기에도 숨이 가쁠 정도로 종횡으로 내달리고 질주했다. 그리하여 그의 삶과 문학은 시대를 넘어, 사람 아닌 존재로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아예 저 멀리 별똥별과 우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이야기인 즉슨, 나이가 50억년인 별똥이 숲에 떨어지는데, 하루살이가 와서 별똥에 앉고는 ‘날이 참 좋다’고 말하고….”(2021.1.16)
익산=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