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는 사상 처음 방한했던 카를로스 사울 메넴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향년 90세로 별세한 가운데 그와 한국의 인연에 눈길이 쏠린다.
시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변호사였던 메넴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페론주의당에 합류해 일찌감치 정계에 입문한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1976년 군부 쿠데타 이후 5년간 정치범으로 수감됐다가 석방 후 리오하 주지사를 역임한 후 1989년 대선에서 페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했다.
이후 1999년까지 10년간 집권하며 페론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 대대적인 국영기업 민영화를 단행했고, 가격 통제정책 등을 폐기했으며, 외국 투자 유치에 힘썼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는 군사정권부터 누적된 대규모 외채와 초(超)인플레이션으로 빈사 상태였다. 하지만 메넴 전 대통령은 연 5000%에 육박하던 인플레이션을 1993년 한자릿수로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넴 대통령이 현직 시절 아르헨티나 정상으로는 처음 한국을 찾은 것도 한국 자본 유치 등 비즈니스 외교 차원이었다. 1995년 9월 메넴 대통령이 먼저 방한해 김영삼(YS)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이듬해인 1996년 9월에는 YS가 남미 순방 도중 아르헨티나를 찾아 메넴 대통령과 해후했다.
당시 두 정상은 경제협력에 큰 비중을 할애했다. 양국 간 항공 협정 및 원자력 협정을 체결한 것은 물론 한국이 아르헨티나의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등 동남아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또 아르헨티나는 한국의 미주개발은행(IDB) 가입과 메르코수르(MERCOSUR) 진출을 적극 돕기로 했다.
눈길을 끄는 건 메넴 대통령의 방한 기간 중인 1995년 9월 30일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세계적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의 복귀전을 그와 YS 두 사람이 나란히 관람한 점이다. 마라도나는 약물 복용 파문으로 15개월 동안 축구계에서 ‘퇴출’당했다가 이날 그의 소속팀 보카 주니어스와 한국 대표팀 간의 친선경기를 통해 국제 무대에 재등장했다.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유연한 볼트래핑과 빈 공간에 찔러넣는 정확한 패스로 팀의 2대1 승리를 견인하며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YS와 메넴 대통령은 경기 시작 15분 전 노타이 정장 차림으로 나란히 입장해 전후반 90분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다. 두 정상이 차례로 시축을 할 때 관중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전반 종료 후 휴식시간에 YS는 경기장 내 귀빈실에서 메넴 대통령과 다과를 함께하며 한국의 2002년 월드컵 유치전을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