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켰다가 오히려 중상해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최말자(75)씨의 ‘56년 만의 재심청구’를 법원이 기각했다. 법원은 최씨 측이 새로 제시한 증거들이 재심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도, “오늘날이었다면 최씨가 가해자로 낙인찍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씨 측은 법원이 구체적인 재심청구 사유를 살피지 않았다고 보고, 즉시 항고하겠다는 입장이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권기철)는 최씨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재심 이유가 없어 기각 결정을 내렸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청구인이 제시한 증거들은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최씨는 1964년 5월6일 밤 좁은 길가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노모(당시 21세)씨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어 1.5㎝ 자른 혐의(중상해죄)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최씨는 정당방위임을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재판부는 “범행 장소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집이 불과 100m이고,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위 집에 들릴 수 있었다”면서 “최씨의 방위 행위는 법이 허용하는 상당한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했다.
판결 이후 사회적 비난 등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었던 최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을 보며 늦게라도 진실을 알리고자 여성단체와의 상담에 나섰고, 지난해 5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 “최씨 측 증거 ‘새로운 명백한 증거’ 아냐”…기각 결정
형사사건 재심은 이미 확정된 판결에 흠결 사유가 있는 경우 재판 당사자 등의 청구를 통해 이뤄진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증거물이 위·변조된 것이 증명된 때’, ‘증언, 감정 등이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 ‘수사에 관여한 검사 등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증명된 때’ 등에 한해 재심사유로 인정한다.
최씨 측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재심청구 공판에서 △기소 전 검찰로부터 변호인 선임권·진술거부권 등을 전혀 고지받지 못한 채 부당하게 옥살이를 한 점 △수사 과정에서 허위 자백을 강요당한 점 △노씨가 사건 이후 병역 신체검사에 합격·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는 새로운 증거를 보면, 중상해가 아닌 가벼운 상해죄나 무죄로 판단했어야 한다는 점 등을 들며 재판부에 재심 개시를 요청했다. 사건 후 시간이 많이 흘러 관련 수사자료들이 없는 상황인 탓에 최씨 측은 병무청 자료 등을 근거로 재판부에 재심 필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최씨 측이 제시한 증거들이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명백한 증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심대상판결 재판부가 당시 의사의 상해진단서·감정서 등 객관적 증거들을 통해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재심대상판결이 ‘(최씨가 노씨를)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하였다’고 판시했으나, 이는 언어기능을 전부 상실했다는 것이 아니라,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로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최씨 측의 주장처럼, 노씨가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보이지만, 그의 언어 능력에는 실제로 상당한 장애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형법상 중상해죄의 구성요건인 ‘불구’의 개념이 반드시 ‘신체 조직의 고유한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것’만을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취지다. 아울러 재판부는 “노씨가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해 복무했지만, 이를 갖고 노씨의 언어 능력에 장애가 없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부연했다.
재심대상판결 재판부가 당시 최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했어야 함에도,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재심이 필요하다는 최씨 측의 주장에 대해선 “재심사유는 판결 확정 후 새로운 증거의 출현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지, 법률의 해석이나 적용의 오류가 발견된 때가 아님이 분명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최씨가 당시 검사로부터 불법 구금됐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이를 증명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자료가 제시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보면, (불법 구금 등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했다.
◆최씨 측 “재판부, ‘당시 시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전제”…즉시 항고
최씨를 지원하는 여성단체와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즉시 항고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씨 변호인단은 “재판부는 기본적으로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전제하에 청구인의 구체적인 재심청구 사유를 살피지 않고 판결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법원은 가해자가 군대에 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재심대상판결에서 말하는 ‘일생 말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하였다’는 의미를, ‘유창하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의미로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면서 “‘유창하게 말을 못한다’는 것과 ‘발음의 현저한 곤란을 당하는 불구’는 전혀 다른 의미”라고 반박했다.
최씨를 지원하고 있는 부산여성의전화의 배은하 성·가족폭력상담소장은 “기각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었는데, (재판부가) 이렇게 결정 내린 것에 유감”이라면서 “최말자 선생님 역시 억울하게 구속까지 됐던 부분 등을 재판부에서 바로잡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 “현재와는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서 나온 판결…‘법적 안정성’ 필요”
재판부는 기각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당시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생면부지의 건장한 남성으로부터 힘으로 눌려 성범죄를 당한 순간, 열아홉 소녀는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안에 들어온 혀를 깨문 것”이라며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청구인을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최씨의 재심청구사건은 현재와는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이뤄진 공소·판결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서 당시의 사건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사건 하나하나의 형평을 도모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이념도 쫓아야 하지만, 정해져 있는 법에 따라 혼란을 방지하고 우리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가꾸어 간다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기둥도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변호인단은 이같은 법원의 설명에 대해 “법원이 재심개시결정을 하고 이 사건을 다시 판단해야 하는 이유는 시대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이 발생한 1965년에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무시하고 피해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